오늘 뉴스룸에 봉준호가 나왔다. 역시 예상대로 손석희는 대형 멀티플렉스의 옥자상영 거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봉준호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봉준호는 예술인으로서 영화가 유통되는 과정에 대한 견해보다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필자도 처음엔 궁금해 했다. 왜 봉준호는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야만 했을까? 기사를 찾아보니, 봉준호는 배급 문제보다 창작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해 더 집중한 것 같다. 보통 거대자본이 투자될 때엔, 그 투자자의 입김이 분명히 감독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600억원의 금액을 투자했음에도 봉준호에게 전적인 권한을 위임해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넷플릭스는 봉준호라는 예술인을 존중해준 것이다. 또 봉준호의 발언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대자본이 들어간 영화에서 투자자의 입김이 무시될 수 없는 세계가 영화계라는 걸 알 수 있다.

 가령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마지막 즈음에 나타나는 신파적 장면으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연상호스럽지 않다.’고 비판했고, 필자 역시 블록버스터 대중영화를 만들기 위한 연상호의 타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역이라는 프리퀄을 별도로 만든 건 아닐까?)

 어쨌든, 필자는 넷플릭스라는 투자자가 봉준호라는 감독을 존중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물론 영화가 특정 기업의 영향 아래 탄생한다는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들은 제작사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저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스트리밍 제작사가 나타났을 뿐이다.

 




넷플릭스 제작의 옥자가 국내 영화시장의 질서를 교란시킬까?

필자는 이미 한국의 영화시장의 질서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cgv는 독점 개봉이라는 형태로, 오직 자신의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cj 제작 영화가 개봉할 때, 같은 계열사인 cgv는 해당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준다. 대표적인 예로, 1000만 영화 명량은 과도한 스크린 독점으로 다른 영화들의 상영 기회를 줄이기도 했다. cj 제작 영화가 개봉하지 않아도, 다양성 영화의 상영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따라서 동네에서 다양성 영화를 보지 못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대중이 주로 무엇을 소비하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현재 cgv는 돈독이 오른 모양인지 좌석 차등제를 실시하고 있다. 소위 명당 좌석에는 더 높은 가격을 책정기로 한 것이다. 10분동안 광고를 틀어주는 cgv가 아직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의 거절을 받고도 옥자는 개봉을 할 예정이지만, 오히려 필자는 옥자의 개봉이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낼 거라고 긍정하고 있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도 최종적으로 상영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옥자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대한 극장과 같은 여러 다양한 극장에서 개봉을 한다. 그동안 대형 간판에 가려진 극장들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천에는 반경 1km의 공간에 대형 멀티플렉스가 6곳이나 있고, 강남역 부근에는 7곳이나 있다. 마치 프렌차이즈 편의점이 과하게 들어서면서 슈퍼마켓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꼴이다. 하지만, 유명한 봉준호의 신작이 대형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다양한 극장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봉준호의 말처럼 옥자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극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개봉하는 것이, 극장 영화 문화에 영향을 끼칠까? 아니다.

 이미 스트리밍 영화 시청 문화는 이전부터 꾸준히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우리는 높은 금액을 내지 않고도 핸드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지하철, 버스와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스트리밍 방식은 또 하나의 취향일 뿐이다. 특히 바쁜 일과로 여유가 없는 학생, 직장인들에게 스트리밍 서비스는 접근성 또한 높다. 일상에 더 가까워진 형태의 문화소비 형태는 오히려 여유 없는 일상 속에서 잠깐의 틈새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스트리밍 서비스는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영화관을 즐길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일단 필자 같은 영화광은 영화관을 찾을 것이다. 캄캄한 상영관, 거대한 스크린과 공간을 울리는 스피커는 영화를 감상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다. 오직 영화관에서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여줄 수 없는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영관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스피커의 구성, 아이맥스같이 눈을 가득 채우는 스크린의 극대화는 여전히 관객을 영화관으로 유혹한다. 가령 인터스텔라가 개봉할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이맥스관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어떤 영화는 거대한 스크린과 상당한 볼륨의 스피커 없이는 온전히 즐기지 못할 수 있다.

 물론 영화관은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오락 코스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 극장을 찾지는 않는다. 삶의 여가로서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3d 상영관, 4d 상영관, 자동차 극장과 같은 형태는 영화가 오락의 수단으로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더 제대로 된 몰입을 위해 3d로 봐야 할 영화들도 있기는 하다.) 무엇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광활한 초원이나 우주를 티비나 스마트폰으로 보려고 할까? 영화관보다 스트리밍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스트리밍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여유 없는 사회적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항상 극장에서만 개봉되어야 할까?

 글쎄..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고, 극장이 아닌 형태로도 개봉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뉴스룸에서의 봉준호의 말마따나 새로운 흐름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과의 충분한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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