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증보판 보기 : https://brunch.co.kr/@beajjangmovie/10





퍼니게임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굉장히 가학적인 영화이다. 2007년에 shot by shot 리메이크로 새로운 퍼니 게임을 내놓았다. (즉 언어, 배우, 장소만 다를 뿐, 나머지는 완전히 오리지널과 똑 같은 작품을 말한다. 하네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보여지지 못해서 영어권 사람들을 겨냥해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소비하는 미디어를 조롱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며, 극작술의 규칙과 제 4의 벽을 허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은 클리셰들이 비틀어지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영화가 어떻게 무엇을 비틀고 허무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러한 행동으로 어떻게 의도가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독창성과 성취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극작술의 규칙

극작술이란 극작품을 만드는 수법이다. 많은 영화들이 대체로 선택하는 보편적인 형식을 극작술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클리셰로 바꿔 읽는다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도발이다. 전형성에 대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도발이다.

초반 시퀀스에서 드라마틱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고속도로 씬은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관객은 자동차에서 게오르그 가족이 클래식 시디를 듣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안심하게 된다. 이내 들리는 평온한 클래식 음악과 장난을 치는 가족의 모습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다 갑자기 샤우팅과 스크리밍이 가득한 하드코어한 락 음악이 나온다. 잡음, 괴성과 함께 연출되는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은 굉장한 위화감을 보여준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물과 아이는 헤쳐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네케는그 규칙을 비웃으며, 반려동물인 개를 죽이고 게오르그 부부의 아들을 죽인다. 그들을 죽이는 방식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개의 울음소리로 살해장면을 상상케 하거나, 게오르그 가족이 피터와 몸싸움을 하는 소리와 총성이 울리는 소리로 아들의 살해장면을 상상케 한다.

또 영화 초반 보트 시퀀스에서 아들이 두고 간 칼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인 냥 암시를 하지만, 마지막에 폴과 피터가 안나를 보트에 태울 때, 안나가 주운 칼은 아주 손쉽게 피터에게 뺏기게 된다.

심지어 남편 게오르그는 폴이 휘두르는 골프채 한 방에 걷질 못하게 된다. 기존 영화에서 주인공은 제아무리 부딪히고 맞아도 잘 움직이지만, 하네케는 이러한 영화적 허용을 무시해버린다. 심지어 폴과 피터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 안나가 총으로 피터를 죽이지만 폴이 리모컨으로 직접 영화를 되감기를 해서 총을 빼앗아 못죽이게 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감독은 영화적 허용 대신, 영화의 주인공들인 폴과 피터에게 영화를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4의 벽

영화를 장악한 폴과 피터, 아니 폴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윙크하고 말을 걸며, 영화 자체의 전개마저 바꾸어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독이 제 4의 벽을 허무는 것을 알 수 있다.

4의 벽은 연극용어이다. 본래 연극 공연 중에는 관객이 무대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더라도 관객과 무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관객의 존재를 모른다. 관객들은 이 가상의 제 4의 벽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제 4의 벽이 허물어질 때,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작품 밖의 세상을 모른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사라지게 된다.

피터는 관객을 쳐다보며 어때요? 그들이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던지, 폴과 피터의 놀이에 체념한 게오르그가 그들의 게임에 반응하지 않자, ‘그거 비겁한데? 상영시간은 채워야지.’라는 말을 하며 관객을 쳐다본다. 영화에서 폴은 관객을 인식하며 영화 속 픽션에 동화되지 않고자 하는 인물이다. 게오르그 가족의 옷을 보자. 그들은 꽃무니 원피스, 줄무니 티셔츠, 색이 있는 셔츠를 입고 있지만, 폴과 피터는 오직 흰색의 옷만을 입고 있다. 영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자, 하네케의 의도를 위해 설계된 하네케의 말이다.) 그들은 마치 관객을 위한 것처럼 가학행위를 계속한다. 심지어 피터가 죽을 때에는 영화 자체를 되감는다. 왜냐하면 악당을 무찌르는 전개는 이 영화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은 영화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질서가 관객을 더 절망스럽게 만들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보트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제법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선 가상과 현실이 똑같은 현실이잖아.’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관객을 우롱한다. 그동안 관객에게 윙크를 하고 관객을 위해서 가학행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들은 당신과 우리는 같아.’라는 듯한 메세지를 남긴다. 결국 영화는 관객을 가학적 관음을 즐기는, 폭력 동조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관음증

영화가 시종일관 선사하는 불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소비하려 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드코어 락은 끊임없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속도로 장면, 관객을 쳐다보는 폴의 장면은 끊임없이 우리가 영화를 관찰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이른바 소급효과라 불리는데, 이는 연극에 몰입되지 않아야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거리를 두어 영화가 고발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일컫는다. 영화에서 관객을 향해 고발하는 것은 영화 속 폭력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이자 영화 속 가학에 함께한 방관자로서의 관객이다.

 


'저장'을 하고 '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게이머의 전능함을 비웃는 게임, 언더테일



여기 비슷한 모습의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이다. 언더테일의 시놉시스는, 몬스터가 살고 있는 지하세계에 떨어진 어느 소녀가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모험을 떠나면서 몬스터와 싸울 수도 있고, 몬스터를 살려줄 수 있는데, 몬스터를 죽이면 나중에 특정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주인공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비웃는다. 살려주더라도 주인공의 위선을 고발한다. 심지어 게임을 끄고 몬스터를 죽이기 이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캐릭터는 주인공의 전능함을 비꼰다. 이렇듯 언더테일은 끊임없이 게이머가 주인공에 이입해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이 게임에서 몬스터를 죽일 때, 게이머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미디어 관음증은 소비자가 자신을 미디어를 소비하는 전능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폭력, 가학을 대리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게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퍼니 게임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관음증적 가학성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폴이 말한다.

벌써 끝내려고? 납득할 만한 전개를 하고 제대로 끝내야지, 게임은 계속된다. 일방적으로 그만 둘 수 없어.'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자기가 만든 세계에 주인공을 가두려는 내레이터와 싸우는 게임, 스탠리 패러블



여기 스탠리 패러블이라는 게임이 있다. 그는 회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지시가 나오는대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일을 하는 스탠리가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를 돌아다니게 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이다. 모든 배경과 이야기는 내레이션에 의해 설명된다. 심지어 그는 스탠리의 행동마저 장악하려 한다. 가령, 왼 쪽 문과 오른 쪽 문이 있는 방에서, 내레이션은 스탠리는 왼 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게이머가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내레이션은 들어간 이유를 정당화 하려 한다. 혹은 스탠리를 설득하려 한다. 결국 이 게임에서 내레이션을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끄는 것이다.

게임은 제작자의 정해진 구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 퍼니 게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감독이 설치한 덫에 걸려 빠져나가려 하지만, 탈출구는 영화에 없다. 관객은 사이코가 되어 영화를 즐기거나, 영화를 꺼버리거나 극장을 나가야 한다.

단지 그것만이 답일까?

미카엘 하네케는 우리에게 망치질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폭력에 둔감해지는 우리에게 경종을 올린 것이다. 그것을 본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고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퍼니게임을 즐기지 않게 되고 그러한 영화를 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카엘 하네케가 진정으로 바라는 진짜 결말이 아닐까?



소통하는 영화의 진화

문학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영화가 발전하던 시기에서 몽타주 기법을 극찬했다.

몽타주 기법이란 롱테이크와 상반되는 영화적 기법으로, 컷들을 나누어서 연결하는 기법을 말한다.

가령 무표정의 사람을 담은 컷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식탁에 음식이 놓여있는 컷을 보여준다면, 관객은 해당 컷의 사람이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듯 몽타주 기법은 장면을 쪼개서 그 간극을 관객의 상상으로 메우도록 한다.

벤야민은 그림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몰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화를 낯설게 볼 수 있고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몽타주에 익숙해지고,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폭력, 선입견 등으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두기가 힘들다. 이에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망치질을 시도한다. 가령 퀴어 인권 운동을 다루는 '런던 프라이드'라는 영화는 전형적인 서사구조에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캐릭터를 넣음으로써 관객에게 '게이, 레즈비언을 비롯한 퀴어도 이성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겟아웃'은 '차별'이라는 소재와 '공포'라는 소재를 결합해서, 흑인이 느끼는 차별에 대한 불안을 관객이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관객이 인종차별을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퍼니게임은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비틀어버림으로써 관객을 도발하고 조롱한다. 기존의 제 4의 벽을 허물고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지워낸다. 그리고 영화의 폭력성을 현실에 접속시킨다. 극장을 나온 관객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단순히 오락거리로 소비되었던 영화가 울타리에서 탈출한 것이다. 봉준호의 어떤 영화에서 송강호는 관객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영화는 관객에게 외친다. 당신들에게 전달해야 할 진실이 있다고..

제 4의 벽을 허무는 방식 자체는 항상 영화에 거리를 두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몽타주에 익숙해졌듯이 제4의 벽을 허무는 영화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가령 '데드풀'은 제 4의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참신한 오락을 선사해준다. 또 퍼니게임이 개봉하기 이전부터 제 4의 벽을 허무는 기법은 존재해왔고 오락적으로 소비되어왔다. 중요한 건, 감독이 언제 어떤 재료로 메세지와 어떻게 결합하느냐일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없애고 거기에 폭력을 접속시킨 방식. 그것이 퍼니게임만의 독창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퍼니게임을 굳이 리메이크 한 이유도, 이 영화의 효과가 특히 극장에서 유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거나 형식들을 결합함으로써 영화는 끊임없이 실험한다. 항상 어떤 영화는 울타리에서 나와 관객에게 진실을 외치려고 진화해왔다.



브런치에서 증보판 <옥자> 평론 읽으러 가기

https://brunch.co.kr/@beajjangmovie/2






옥자를 보면서 처음에 느낀 건, 새로운 상상력을 입은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느낀 건, 염세주의를 넘어선 번아웃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필자가 느낀 염세주의는 우리의 현실이었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미약하게 이어 나가는 작은 희망을 보여주려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 옥자는 그런 영화였다.


필자는 옥자를, ‘자본주의라는 키워드와, ‘사회운동’이라는 키워드, ‘언어라는 키워드, ‘희망이라는 키워드로 독해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옥자를 만든 건,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미자와 떨어뜨린 것도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강간시키고, 무대 위에 올리며, 도축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자본주의라는 언어를 지닌 미란도 기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대보험도 들지 못한 트럭 운전수는 노동자의 인권을 보지 않고 오직 노동자를 기업을 위한 기계장치로 보는 기업가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미란도 기업의 경영인은 루시와 낸시로 구성된다. 사실상 사업가 기질이 있는 낸시에 의해 경영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낸시는 오직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니고 회사를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민한 판단력으로 위기를 대처하고, 감정이 배제된 채로 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미자를 상대한다. 그녀에게 논리적 허점은 없다. 다만 윤리적 감수성이 빠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낸시에게 루시는 필요한 존재이다. 루시는 대중들에게 자신, 자신의 기업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녀는 이미지에 집착하며, 자신을 치장한다.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기꺼이 간판이 되어준다. 자본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계산적이고 논리적이며 윤리적 감수성이 배제되어 있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이미지는 따뜻하며 항상 대중을 속인다. 노조 없는 기업으로도 유명한 삼성, 최순실과 유착 관계에 있었던 삼성 역시 따뜻한 감성의 캠페인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루시는 낸시를 위한 마스크이다. 자본가 루시는 낸시라는 마스크를 쓰고 완전해 진다. 그들이 서로의 담배를 맞대서 불을 지피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루시의 경영권이 낸시에게로 전달되는 의미로도 보인다.)

그렇게 옥자를 이용하는 미란도의 기괴함은, 루시의 재기발랄한 이미지, 퍼포먼스와 낸시의 실험, 도축의 결합으로 탄생한다.

 




사회운동

ALF는 굉장히 흥미로운 단체다. 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투쟁한다. 옥자를 잡으려는 경비대와 경찰들을 우산으로 막고, 연막탄을 쏘며 쇠구슬로 넘어뜨린다. 미자에게, 경찰을 막기 위해 우산을 펼치는 ALF 대원들의 모습은 불꽃놀이처럼 그려진다. 차가운 현실 위의 미자에게 새로운 동화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명장면이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심지어 케이는 미자가 자신들의 계획이 시행되길 원치 않는다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한다. 이토록 완벽한 비폭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민낯은 이후에 드러나게 된다. 제이가 비폭력적인 투쟁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40년을 이어온 ALF의 전통 때문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옥자를 중심으로 한 계획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거짓말을 한 케이에게 제이는 전통을 깨뜨렸다는 명목으로 케이를 폭행한다. 옥자가 실험소에 들어가서 끔찍한 일들을 겪을 때, 레드는 모두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일침을 놓는다. 동물 해방을 위해 힘쓰는 그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옥자는 신념의 대상이자 투쟁의 수단이었다.

서울에서 보여준 그들의 완벽한 동화는, 뉴욕에서 해체되면서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낸다. 미자를 깨문 옥자를 내리치려던 제이와, 그것을 막는 미자의 모습에서, ALF와 미자는 그렇게 구분된다.

 




언어

산골마을 미자는 옥자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옥자도 미자가 원하는 걸 안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는 존재이다. 미자가 옥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가 미자에게 귓속말을 한다그들은 주체적 관계자이다. ‘동물이라는 범주와 인간이라는 범주로 나뉨에도 그들은 동등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도시 도시는 광장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도란도 기업의 친환경 프로젝트가 알려지기도 하고, ALF에 의해 그들의 반윤리적 행태가 고발되기도 한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술, 산업의 발전을 이룬 공간인 도시에서 미자는 미란도 회사의 꽉 막힌 유리벽과 옥자를 홍보하기 위한 무대, 간판이 되기를 강요하는 자본가 어른들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비폭력적으로 투쟁하는 ALF를 마주하기도 한다.

자본가나 운동가, 그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한다. 옥자나 미자에게 그들은 외부인이며 소통하기 어려운 주체들이다. 심지어 어른으로서 그들이 아이인 미자를 상대할 때 그들이 가진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옥자를 만나고 싶을 뿐인데, 어른들의 사정은 복잡하다. 서울의 트럭에서 미자와 옥자를 내버려두고 강으로 빠질 때, 남아있는 미자와 옥자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기까지 한다. 이러한 고립 속에서 미자의 모험이 지속되는 건, 옥자라는 동기 덕분이었다.

도축장 마지막으로 미자가 마주하는 건 돼지들이 가공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낸시를 만난다. 낸시와 상대하기 위해 미자가 배워야만 했던 언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 사회의 필수적 언어인 영어이고,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언어이다. 그 두 가지가 가능할 때, 미자는 옥자의 구매자가 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친구인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는 도시문명과 자본주의, 산업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구매자가 되어야만 했다.

 




희망

영화는 미란도 기업을 무찌르면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구해낸 새끼 슈퍼돼지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동안 미자가 옥자에게 감을 던져주었다면, 이제 새끼돼지는 미자에게 감을 물어다 준다. 10년 뒤 새끼 돼지는 어떤 존재가 될까? 사회에 나서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회에 나설 수 있는 미자에게 식품 산업에 저항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녀가 직접적인 저항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새로운 감수성을 부여할 것이다.

미자의 모험담도 휘발되지 않는다. 그녀가 마주한 ALF의 비폭력적 투쟁 방식은 미자의 감수성에 새로운 상상력을 넣어 주었을 것이며 훗날 그녀에게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트럭 운전사의 탈조선 선언도 자본주의 한국에 대항하는 지친 청년 노동자의 저항이다. 결국 그는 ALF를 알게 되고 ALF 활동가가 되는 탈 한국인이 된다. (쿠키영상에 나온다.)

영화 곳곳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개인들과 새로운 감수성, 상상력의 개인들이 있었다. 설국열차처럼 사회를 해체하지는 않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반적 서사는 굉장히 씁쓸하지만, 우리가 봉준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건 10년 뒤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엔딩을 만들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관객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도록..








브런치에서 증보판 읽으러 가기 : https://brunch.co.kr/@beajjangmovie/13




1. 들어가기.

여러 가지 기발한 각본을 써왔던 찰리 카우프만이 듀크 존슨과 함께 감독으로는 두 번째 작품인 아노말리사를 내놓았다. 아노말리사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중년 남성의 사랑을 다룬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목소리를 녹음한 성우가 총 3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마이클의 목소리, 또 하나는 리사의 목소리, 다른 하나는 그 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애니메이션의 형식 또한 흥미롭다. 캐릭터는 사실적인 질감을 지녔지만, 얼굴에는 조립된 흔적이 있다. 그래서 눈 옆에는 윤곽선이 보인다. (기존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차별을 두기 위해 설정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더 섬세한 감정 묘사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방식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요소들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사랑에 대한 찰리 카우프만의 시선을 담기 위한 장치들이다.

 




2. 영화 분석하기.

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일까?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빌리자면 스톱모션의 효과는 운동의 정지 자체가 시각적인 자극효과를 가지며, 어느 순간의 움직임을 멈추게 함으로써 순간을 해명하거나 강조하는 이용된다.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은 시종일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동기는 거기에만 있지는 않아 보인다.

 마이클이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카운터에 있는 장면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드러난다. 방을 검색하는 카운터 직원의 손놀림은 분주하지만 그의 얼굴은 마이클을 향해 고정된 채로 멈춰 있다. 종업원은 온화한 표정으로 매번 웃지만, 모습이 어색하게 보여진다. 이러한 위화감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스크의 허상을 연상케 한다.

 그밖에도 인물의 섬세한 감정을 담기 위한 이마와 턱의 구분, 구분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 등등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활용되는 지점일 것이다. 부분들은 후술하도록 하고, 우선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마이클과 리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자기의 고유한 색깔을 지니지 않았다는 느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다. 그저 다른 머리와 다른 의상을 했을 뿐이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모두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말투마저 동일하다. 일률적 얼굴과 목소리는 영화를 건조하게 만든다. 각양각색의 목소리로 어우러진 생동감을 느끼기가 힘들다. 심지어 노래에 나오는 목소리마저 똑같다. 이는 세계에 대한 마이클의 권태를 보여준다. 마이클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답답해 하거나 짜증나 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의 표정은 밝은 적이 없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이미지들은 마이클과 별개로 설명될  없다. 사실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피로하고 주변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를 반영한 세계이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질감이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조립된 흔적들이 보여주는 작위적인 모양새가 괴리감을 형성한다. 괴리감은 존재와 실존 사이의 괴리감이다. 그들은 모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서 실존하지 않는다. 다양한 옷을 입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이클에게는 모두 똑같은 엑스트라인 것이다.

 가장 위화감을 주는 표정을 지닌 호텔 종업원은 마이클과 닮은 구석이 있. 종업원의 미소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마스크를 끼고 언제나 고객에게 웃어야만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종업원은 노동시간과 일상시간 사이의 감정의 괴리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마이클은 서비스업을 다루는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의 저자이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를 사람들과 단절된 캐릭터로 묘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면서도 사람들과 단절된 사람인 것이다. 책의 표지에서 보이는 그의 미소와 달리 그는 언제나 침울하다. 호텔에서 그는 서비스를 받지만 호텔은 관계가 단절된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심지어 그가 호텔에 머무는 시간, 도시에 머무는 시간은 하루밖에 없다. 그에게 여유가 없다. 편안한 호텔 룸에 보이는 풍경은 돈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피로인간들의 군집 사회를 연상케 한다.

마이클이 룸서비스를 위해 수화기를 들었을 나오는 세분화된 리모컨 버튼들도 흥미롭게 읽힌다. 분명 고객의 편의를 위해 세분화 되었을 햄버거 버튼, 둥근 요리 접시 버튼, 통닭 버튼, 닭다리 버튼은 오히려 서비스를 받는 마이클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버튼이 되어버린다. 나은 서비스를 위한 버튼들, 그리고 서비스업 강연을 하면서도 서비스를 받을 그러한 버튼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머뭇거리는 마이클의 모습은, 서비스를 이야기 하는 마이클과 서비스를 받는 마이클 사이의 괴리감을 보여준다.

호텔 룸에서 마이클이 밖을 내다볼 , 오직 어두침침한 건물들만 보인다. 문득 건물 안에 있는 남성이 자위를 하는 장면이 포착된다. 남성은 무엇을 상징할까? 호텔에서 비치는 빌딩은 마이클이 다가가지 못하는 공간이다. 오직 호텔 룸에서 몰래 자위하는 남성을 있다. 남성이 마이클을 쳐다볼 , 그는 커튼 뒤로 숨는다. 그는 남성을 당당하게 없다. 남성이 위치한 공간도 어두컴컴하고 은밀한 공간이다. 공간은 마이클의 내면을 반영한 세계의 무의식의 공간인 것이다. 마이클의 무의식속에 섹스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영화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자세한 설명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칙칙한 현실 속에서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그러나 지쳐버린 마이클은 화장실 거울에서 다양한 감정들로 분열된다. 자기 의도와 다르게 마치 경련하는 것처럼 변환하는 그의 표정들은, 마치 마스크에 가려져 억눌려 있다가 긴장이 풀린 순간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이클은 자신의 얼굴을 뜯어내려 한다. (이는 이마와 턱을 분리시킨 새로운 형태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성을 이용한 독특한 효과이다.) 때마침 여성 목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그의 세계에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한 것이다.

마이클에게 리사는 거짓 같은 세계에 나타난 여자 주인공이다. 일률적이고 건조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킬 그녀가 나타났다. 변칙성으로서의 아노말리사. 그녀는 사실 얼굴에 흉터가 있고 뚱뚱하다. 다시 말해 남성들이 좋아하지 않을흠집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마이클의 구애는, 적어도 그녀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마이클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은 무언가 불편하다. 마이클은 리사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들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리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목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한다. 마이클에게 리사는 목소리를 듣기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목소리는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 주는 마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이클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달콤한 판타지를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아노말리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할 때, 마이클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가 권태를 느끼는 시점은 그들이 섹스를 하고 난 다음날이다.

 마지막에 마이클이 아들에게 선물하는 일본 게이샤 인형을 떠올려보자. 그 인형 역시 남들과 다른 여성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목소리는 인형을 산 남성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정액을 받아낸 박제된 여성. 외로운 마이클은 자신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마법 같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의 사랑의 본질은 아이러니하게도 섹스였다.

 




 마이클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그들의 정체를 의심한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할 모른다. 영화가 중간 중간 보여주는 판타지는, 껍데기를 지닌 그들이 모두 다를 없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마이클도 껍데기를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분명 마이클은 다른 외모와 다른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세계에서 마이클은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럴 수밖에 없다. 세계는 마이클의 심리를 반영한 세계이다.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 이미 판타지이며, 그것은 마이클의 색안경과 보청기를 투과한 모습이다. 그러니 색안경과 보청기를 주체는 당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은 이기적 주체로서의 개인인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은 자신의 꿈에서 턱관절을 떨어뜨린다. 이때, 턱관절은 열심히 말을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타자와 자신을 구분케 하 껍데기가 분리될 때, 그를 무슨 존재라고 정의할 있을까? 껍데기가 없는 마이클은 남들과 다를 없는, 그저 반응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감독은 모든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전제하고 영화를 진행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마이클 스스로가 인간을 그러한 존재, 사회에서 마스크를 끼고 관계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화장실 거울에서 다양한 감정들로 균열할 그가 자신의 마스크를 뜯으려 하는 모습에서, 그는 이미 마스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던 아닐까?

외롭고 지친 마이클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마이클이 오랜만에 사랑과 만나는 장면에서, 어떤 변화를 느꼈냐고 묻는다. 그가 그녀를 변화시켰냐고 묻는다. 그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신을 받아들인 상대방이 어떤 변화를 했는지에 집중한다. 마이클은 사랑에게 자신의 호텔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이에 화가 그녀는 떠난다. 떠나는 그녀를 향해 마이클은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는 아내에게도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 반면 리사는 시간만에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강연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마이클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해는 안되지만 받아들일게요.’라는 말을 한다. 마이클은 이해, 답을 찾는 중시하지만, 리사는 그것보다도 자신이 상대방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초점을 둔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3. 나오기.

 리사와의 섹스에서 마이클은 리사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한다. 마이클에게 리사 목소리가 없는 섹스는 불가능하다. 섹스가 끝나고 아침이 되자, 젠틀했던 마이클은 리사에게 자신이 불편해 하는 것들을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마이클에게 사랑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여성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만족, 성적인 만족, 지친 자기 삶에 활력을 얻는 만족, 불편함을 주지 않는 만족. 그런 그가 권태의 굴레 속에서 지쳐버리고 세계를 의심한다. 하지만 그는 번도 자신을 의심해보지 않았다.




브런치에서 증보판 <겟아웃> 평론 읽으러 가기.

https://brunch.co.kr/@beajjangmovie/3




1. 들어가기

 최근에 개봉한 겟아웃이 한국에서 흥행 돌풍을 몰고 있다. 로튼토마토 99%의 경이로운 기록을 지닌 겟아웃은, 유명한 코미디언 조던 필에 의해 만들어진, 인종차별을 다루는 공포영화이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이유는, 인종차별이 담고 있는 상처를 공포라는 장르에 적절히 녹여낸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겟아웃이라는 인종차별에 대한 영화는 관객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외치고 있고, 또 어떻게 외치고 있는가?

 




2. 장면 분석하기

 영화 초반부에서는 쉬지 않고 불안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아예 처음부터 흑인이 납치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이 사회는 흑인 혐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불안감이 멤돌 수밖에 없는 사회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전개될 사회가 그러한 불안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관객에게 체험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더 자연스럽게 백인 가족과의 만남을 앞두고 가지는 불안감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로즈의 부모를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의 표면적인 예의를 보지만, 흑인 노예를 연상시키는 흑인 집사, 일꾼을 마주하게 된다. 로즈의 아버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수상하고 이상하게 보여진다. 마치, 차별이 더 보편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준다.

 크리스가 로즈의 사진첩을 발견할 때까지, 그는 백인들의 차별적 언행과, 그들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파티장은 그러한 무례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과 함께 오고 간다. 그것은 차별이 보여주는 현실, 그러니까 당사자 외의 기득권자는 그것에 둔감해서 느끼지 못해 벌어지는 기이한 현실과 같은 인상을 준다.

 차별에 대한 불안과 주인공을 둘러싼 음모에 대한 불안은 중첩된다. 이 불안감이 중첩되면서 관객은 더 자연스럽게 무엇이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말인지를 찾게 된다. 더욱 인물들의 언행에 세세하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무슨 의도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말이다. 크리스는 그들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 오직 카메라 렌즈 뒤에 숨어서 그들을 엿볼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관객에게 불안감을 통해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빙고 게임은 그 불안감을 확신 시켜준다. (사실 예고편이 이 장면이 주는 충격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설마 했던 바로 그 장면. 크리스라는 흑인을 경매하는 그 장면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여느 공포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공포를 심어준다. 물론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을 놀래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보다도 크리스를 향한 백인들의 차별적 언행, 수상한 백인들의 행동, 이상한 흑인들의 모습들은, 그것들이 밝은 대낮에 넓은 집과 정원에서 보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과 긴장감을 준다. 심지어 크리스를 경매하는 장면은, 명목적으로는 그들이 빙고 게임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일상적 놀이와 인간을 경매하는 반인륜적 행위 사이의 이질감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이질감은, 크리스가 갇힌 지하실에서도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지하실은 어두운 밀실이라기보다는 밝고 넓은 방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방은 크리스를 중심으로, 그리고 크리스의 앞에 있는 박제된 사슴 머리를 중심으로 극도로 대칭의 상태에 놓여진다. 이 완벽한 대칭상태가, 이 인공적인 공간감이 우리에게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박제된 사슴 머리를 들고 복수를 하는 크리스의 모습은 백인과 흑인 구도의 전복을 통해, 흑인 혐오로 형성된 공포를 파괴한다.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힘을 다 빼놓는다. 경찰차가 올 때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다. 그러나 친구 로드가 나오는 것을 보고 손을 내린다. 사실 미국은 백인 경찰의 흑인 과잉진압 논란이 들끓는 국가이다. 2014년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는, 마이클 브라운이라는 18살 소년이, 비무장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백인 경찰로부터 6차례 사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이미 여러 방면으로 차별을 받고 있던 흑인들은 이에 대항하는 시위를 열기 시작했다. 이것은 2004년도 아닌, 2014년에 벌어진 인종 차별에 관한 사건이다.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것을 연상케 한다. 물론 크리스가 쓰러진 로즈 위에 올라서 있고, 다친 로즈가 도와 달라는 말을 하기 때문에, 크리스가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은 충분히 흑인이 가해자로 의심받는 현실을 연상케 한다. 체념하는 듯한 크리스의 눈빛, 전체 맥락이 있음에도 흑인이 가해자의 위치로 몰리는 상황, 백인 경찰(로 추정되는 경찰차). 이것들은 차별로 인해 폭력을 당한 크리스에게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친구 로드가 경찰차에서 나오는 걸 본 크리스가 손을 내릴 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저 사람이 이렇게 고생을 해야만 하는거지?’, ‘왜 저 사람은 손을 올려야만 하는 걸까?’ 힘이 빠질 때 필자는 서러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공포와 스릴러가 작동하는 동력은 바로 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3. 나아가기.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도 새롭게 시작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은 아무렇지 않게 발화하고 소비했던 흑인 혐오적 언행들을 흑인들에게 불안함을 줄 수 있는 폭력적 언행임을 인지하게 된다. 적어도 한국의 경우, 넷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던 흑형’, ‘역시 운동 잘하는 흑형’, ‘음악을 잘하는 흑형등등의 워딩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변화가 일어날 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래서 필자는 겟아웃이 관객에게 우리가 겪는 일상은 공포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만큼 차별과 불안으로 넘쳐난다.’고 외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페미니즘 공포 영화, '스텝포드 와이브스' (1975)



 여기에 비슷한 영화가 있다. 바로 스텝포드 와이브스라는 1975년에 개봉한 공포 영화이다. 이 영화가 겟아웃과 궤를 같이하는 이유는, 남성들은 당연하게 여기던 여성의 일상을 소재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체험시키기 때문이다. 스텝포드 와이브스도 겟아웃만큼이나 끔찍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설정을 가능케 하는 동력에는 차별과 혐오가 있다. 이 두 영화는 결국 남성의 판타지(여성은 예의바르고 참한 성격과 섹슈얼한 몸만 있으면 된다.)와 백인의 판타지(흑인은 훌륭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흑인도 많다. 그러나 판단력에 있어서는 백인이 앞선다.)가 얼마나 괴기스러운 판타지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닐까?

 사실 흑인 인권을 다루는 영화는 여럿 있었다. 과거 노예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20세기의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는 영화들은 기억난다. 하지만 겟아웃처럼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일상적 관계 속에서 흑인들이 느낄 수 있는 교묘한 차별과 혐오를 어떤 영화에서 볼 수 있을까? (있다면 알려주시길..) 그러한 불편한 소재가 장르 영화에서 쉽게 채택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또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들은 수많은 백인 배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주 가끔 유명한 흑인 배우가 주연을 할 뿐이다.) 흑인이 주연으로 있으면서 흥행을 한 장르영화는 매우 드물다. (물론 장고 : 분노의 추격자라는 멋진 장르 영화가 있지만, 이 영화도 결국 19세기라는 아득한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 않던가?) ‘겟아웃은 흑인 감독, 흑인 배우와 함께 아예 대놓고 현재의 교묘한 흑인 차별을 고발하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장르영화이다. 이 영화는 눈과 귀를 틀어막은 차별주의자들, 자신이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기득권을 누리는 주류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이라는 정서를 담은 영화적 체험을 통해, 망치질을 한다. 이것은 공포와 스릴러라는 장르를 이용한 시의성 있는 인종 차별영화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안과 공포를 체험한 관객은 흑인의 일상을 다시 생각해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4. 나오기.

그래서 겟아웃은 공포영화일까? 분명 혐오와 차별을 받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복수를 하며 영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전복적 공포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영화가 무언가를 열심히 고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의 생각에 겟아웃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에 자신의 불안함을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서 체험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공포가 작동하는 방식보다, 공포가 작동하는 이유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래서 이 영화를 공포영화가 아니라 차별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브런치에서 완성본 읽기

https://brunch.co.kr/@baejjangmovie/26





*이 글은, 1년 전 미학 수업에서 제출했던 과제를 다시 다듬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논문, ‘모바일 미디어와 공간적 실천 -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 중심으로 –, 문안나를 참고하여 썼습니다보톡스 샬롱 씬’, ‘젭의 집에 대한 분석, 그리고 젭의 걷기.’ 행위 아이디어는 위 논문에서 가져왔습니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 - The Beatitudes



1. 들어가기.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2014년에 개봉한 영화로, 201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영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세련된 음악과 함께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수려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간단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의 주인공 젭은 인기 작가이자 유명인사이다. 물론 젊었을 때 소설 한 권을 쓴 이후로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그는 상류 사회에서 유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상류 사회에서도 최고가 되길 원하며, 최고가 되어서도 파티장을 무력하게 할 정도의 아우라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점점 그는 자신의 삶과 주변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떠나고, 아무도 그를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한다. 그러던 중, 성녀를 초청한 파티장에서 성녀를 만나게 되고, 성녀는 젭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암시해 준다. 마지막에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 감성, 감정, 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 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영화는 다양한 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어, 욕망, 과시와 같은 허상으로 존재하는 껍데기들, 예술이라는 형식을 지닌 작품들, 성스러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그것들을 일종의 재료로 활용하여 감독은 차근차근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하여 전달한다.

영화는 주인공인 젭이 걷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걸으며 다양한 일상들을 감상한다. 장면 장면마다 젭은 ‘감상자’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영화에서 우리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 시선에는 상류 사회의 삶에 대한 염증, 혹은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묻어있다.

 




2. 장면 분석하기.

영화는 로마의 아름다운 건축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으나, 그 곳의 주민들은 조각상 옆에서 책을 읽거나 물로 손을 씻으며 주체적으로 공간과 관계한다. 그 뒤에 일본인 관광객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로마의 건축물은 관람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을 찍는 일본인 한 명이 쓰러진다. 그들의 관광이 일시정지되며 사람들이 몰려든다. 관광객의 졸도로 관람의 대상으로만 남았던 그 공간은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비명소리와 함께 장면은 파티장으로 옮겨진다. 파티장 연출에서도 흥미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파티장의 스트립걸은 쇼윈도 안에서 음란한 복장으로 관능적인 춤을 춘다. 유흥에 빠져버린 파티 참가자들에게 스트립걸은 그저 관음증적 대상일 뿐이다. 스트립걸의 파티 참가자들에게 소유된 쇼윈도라는 공간에서 구체적 관계는 단절되었다. 오직 특정 목적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쇼윈도를 바라보는 파티장에 머물지 않고 쇼윈도 안으로 들어간다. 파티장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사라지고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스트립걸이 몸짓하는 소리만 들린다. 이 순간 쇼윈도는 관음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스트립걸의 구체적 일상에 침투한 것이다. 이 때 쇼윈도는 관계가 단절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 된다. 물론 거시적으로 스트립걸의 삶은 관중의 욕망에 의해 구속되어 있겠지만 그럼에도 스트립걸의 구체적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중년 스트립걸과 관련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산책을 하는 젭은 매우 독특한 건축물에 도착한다. 그는 아이를 찾는 엄마를 지나쳐 돔형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출물 한가운데에 있는 바닥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은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젭은 그 사이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젭을 비춘다. 아래에서 아이가 누구냐고 묻는다. 젭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참, 아무도 아니지.’라고 말한다. 당황한 젭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 길을 걷는다. 젭은 지상에 있고, 아이는 지하에 있다. 철조망은 무언가를 가두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아이를 가두고 있는 건지 젭을 가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지하의 아이의 목소리는 지상을 걷는 유명인사를 무력케 한다. 젭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무수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어떤 아이에 의해 무력화된 것이다. 카메라는 결코 지하의 아이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온갖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길들여지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녀는 결코 젭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언어적 발화행위는 언어로 점철되어있는 잡담 속 젭을 뒤흔든다.

이제 젭은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스트립걸을 만나게 된다. 스트립걸을 만나기 전에 카메라는 두 명의 여성들을 통해 현대의 슬픈 여성상을 보여준다. 리무진 안의 슬픈 창녀, 히잡을 쓴 슬픈 여성, 이들은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에 의해 대상화되고 소유되는 ‘여성’으로 드러난다. 다시 카메라는 친한 친구를 만나 룸으로 들어가는 젭을 따라간다. 그는 친한 친구의 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50대 중년 스트립걸로, 지적인 스트립걸을 꿈꾸고 있다. 스트립걸 활동으로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나중에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진다. 그녀는 전형적인 형태의 가정을 꾸리는 걸 거부한다. 애초에 결혼에 대한 욕심이 없다. 스트립걸로서 그녀의 몸을 영화는 매우 관능적이게 보여주지만, 대화 속 그녀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만큼 대상화되지 않는다. 멀리서 그녀는 대상화되는 창녀이지만, 그녀의 구체적인 삶은 대상화되지 못하며, 오히려 욕망을 취하는 관중들보다도 주체적이다.

젭은 보톡스 시술을 하는 샬롱에 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오직 시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 시술사가 주도하는 대화조차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한 도구적 발화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샬롱은 젊음에 대한 욕망이라는 목적에 의해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 때 다한증이 심한 수녀가 그곳을 찾아온다. 수녀의 등장은 젭의 이목을 끈다. 수녀에게 기도해달라 말하는 시술사의 모습은 위화감이 든다. 수녀라는 성스러움은 자본주의의 옷을 입은 인간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 것이다.

감정 역시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젭은 중년 스트립걸을 파티장에 초대한다. 파티장에서는 여러 예술공연들이 진행중이다. 그리고 어떤 소녀가 벽에서 페인트칠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다. 공연을 하기로 한 소녀가 친구들과 놀고있는 걸 본 어른들은 친구들을 내쫓으며 소녀를 재촉한다. 수의사가 꿈인 소녀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지만 결국 어른들에게 이끌려 무대로 향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어린 예술 소녀의 행위는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온갖 페인트들을 진흙처럼 뭉개고 절규하며 달려드는 소녀의 몸짓은 그녀를 이용하려는 어른들에 저항한다. 그렇게 흰 벽은 온통 진흙 색 페인트들로 뭉게진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결과물은 다르게 나타난다. 갑자기 벽은 소녀가 칠해놓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된 것이다. 구체적 경과를 떠나서 이러한 장면배치는 방금까지의 서럽고 슬픈 소녀의 저항을 무색케 한다.

젭이 감상하는 성스러움, 감정, 즉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그러나 젭 본인은 오히려 그러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적 질환을 가졌던 어느 청년의 죽음으로 장례식이 열린다. 젭은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중년 스트립걸에게 알려준다. 젭은 왕처럼 어느 넓은 의자에 앉아 중년 스트립걸의 장례식 예복을 점검해준다. 중년 스트립걸은 넓은 무대 위 조명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평가받으며, 한구석에 자리잡은 진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이 이미지는 격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례식장에 가기 위한 옷을 갈아입는 공간임에도, 집 한 채가 될만한 규모의 공간에서 한 명의 여인이 옷을 고르며 젭에게 평가받는다. 젭은 평가자로서 그녀를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알려준다. 그 공간에서 감정이 오가는 장소로서의 장례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오직 장례식이라는 커다란 사교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위해 존재하는 비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 장례식장에서 젭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는 격식을 차리며 행동하려 하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죽은 청년의 친구가 관을 들기로 하지만, 애초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청년의 관을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다. 결국 젭과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관을 드는데, 몇 걸음 걷다가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장례식 예복을 갈아입었던 공간에서 그는, ‘장례식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유가족의 슬픔을 빼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실례’라고 말했었다. 젭의 격식은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젭이 오직 상류사회만을 걷는 건 아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공간을 걷는 행위도 영화에서 나타난다. 가령 그는 양로원 같은 공간에 들른다. 그곳에는 노인들이 모여 한가로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 공간은 주체들의 구체적인 행위로 일상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갑자기 한 노인이 젭을 향해 묻는다. ‘누가 당신을 돌봐주죠?’ 그 말에 젭은 생각에 빠진다. 그가 꿈꿔왔고 즐겨왔던 일상이 허상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몸담은 상류사회에서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성찰이 없는 여흥만 존재하지만, 보잘것없는 양로원에서는 오히려 젭에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하에서 소음뿐인 지상을 향해 존재를 폭로한다. 이는 지하에서 지상 위에 있는 젭에게 아무도 아니라고 말한 소녀를 연상케 한다.

이제 영화의 커다란 메시지는 더 노골적인 이미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젭이 찾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삶의 순간들 속에서 시끄러운 소음 밑에서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기린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리허설 현장은 그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준비중인 무대에 찾아간 젭은 마술사에게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마술사는 ‘이건 다 속임수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갑자기 뒤에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한 오랜 작가 친구가 찾아온다. 그는 로마에 실망했다며 유일하게 떠오른 작별인사 친구가 젭이라고 말하며 인사를 하고 떠난다.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앞을 돌아본 젭은 사라진 기린을 보며 놀란다. 기린은 젭이 찾아 헤메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린이 사라지는 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 오직 순간에서만 드러난 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라지게 하는 행위가 속임수라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것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는 젭의 발화는 허상, 허위로 가득 찬 일상에 대한 염증으로부터의 탈피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술사의 거절은 그 탈피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제 파티장에서도 젭은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젭의 집은 밤에는 사교장, 파티장으로 존재하는 비장소가 되지만, 아침에는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늙은 노인의 일상적 공간이 되어버린다. 가사 도우미는 오직 아침에서만 등장하지만, 영화의 후반 부분의 파티장에서 젭은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눈다. 파티장에서 가사 도우미와 대화하는 모습은 밤의 유흥, 향락, 쾌락으로부터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가사 도우미에게 실존적 고민을 털어놓지만 대화가 되질 않는다. 여기에서 그의 고독이 드러난다.

영화는 성인의 경지에 오른 마리아 성녀가 젭의 집에 방문하면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리아 성녀는 반송장처럼 늙은 할머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교계 사람들이 자리를 마련해 그녀를 영접한다. 무대에 왕처럼 마리아 수녀가 앉혀 있고, 하나씩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매우 엄숙하지만 오직 마리아 수녀만이 소녀처럼 발을 앞뒤로 흔들 뿐이다. 종교계 사람들 중에는 보톡스를 맞은 수녀, 속세의 여흥을 즐기는 추기경도 있다. 그 공간은 엄숙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직 성녀 마리아만 그 공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다리만 흔들다. 흔들다 떨어진 슬리퍼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장면은 일종의 코미디가 된다.

성녀는 스스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오직 대변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몇몇 사람이 그것에 불만을 보이자 스스로 입을 연 성녀 마리아는 ‘난 가난의 서약을 한 몸이라 가난에 대해 얘기할 수 없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죠.’라고 고백한다. 즉 성녀는 언어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성녀 마리아는 젭의 집,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는다. 마침 지나가는 홍학들이 젭의 테라스에 있는 그녀 주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 광경을 본 젭이 조용히 성녀 쪽으로 간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수녀의 질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말하자, 성녀 마리아는 자신이 식물의 뿌리만 먹는 이유가,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바람을 불자 홍학들이 모두 날아간다. 잠깐 쉬었다 날아가는 홍학들은 순간에만 머무는 궁극의 아름다움이자 새벽의 꿈과 같은 찰나이다. 성녀 마리아의 말은, 결국 껍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식물의 뿌리는 지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고, 유려하거나 세련되지도 않으며 아주 잠깐 동안 등장하다가 떠난다. 영화는 그렇게 궁극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 젭은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감성감정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3. 나오기.

과거의 흔적, 성스러움, 세속성을 지니고 있는 로마에서 젭은 끊임없이 걸었다. 걸으며 영화의 메시지가 녹아있는 다양한 파편들을 마주한다. 스트립걸의 쇼윈도, 수도원, 지하와 지상이 나뉜 건축물, 젭의 집, 중년 스트립걸, 보톡스 시술 샬롱, 파티장의 예술공연, 장례식 예복 피팅룸, 장례식장, 양로원, 마술 리허설 무대, 성녀 영접실, 홍학들이 내려앉은 테라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인생 사진전, 지명수배자의 집,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전시된 은밀한 공간, 과거 등대 앞 첫사랑과의 만남까지, 모든 파편들은 공간, 행위, 시선에 의해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 의미를 관통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궁극적 아름다움의 정체이다. 그리고 말미에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지 않되, 그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며 끝낸다. 영화는 유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온전히 드러내지 않거나, 보잘 것 없는 이미지가 주는 정서를 업고 나타나거나, 조명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잠깐동안 드러났다 사라지는 등의 연출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코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언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비언어적 행위나 연출 등으로 언어화된 것들을 무력케 한다. 그 아름다움을 눈치채든 눈치채지 않든, 아름다움은 어김없이 존재하며 영화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브런치에서 증보판 읽으러 가기 : https://brunch.co.kr/@beajjangmovie/9









1. 들어가기.

 자비의 돌란의 5번째 작품 '마미'는 전에도 다뤘던엄마를 주제로 한다. 그는 이미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그린, ‘나는 엄마를 죽였다.’를 찍은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엄마를 죽였다.’에서 아들은 엄마를 거부하지만, ‘마미에서는 아들이 지나치게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미에서 인상깊은 것들 중 하나는 역시 화면비이다. 1 1 화면비 덕분에 영화에서는 풍경보다 인물이 더욱 중심적으로 드러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자비에 돌란의 스타일과 어울리는 화면비이다. 또한 답답해보이는 느낌을 주어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비의 형식이 영화 전체와 조응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화면비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이미지들은 충분히 영화의 색깔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화면비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건 자비에 돌란이 보여주는 새로운 영화적 체험이다.

 이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필자는 관계 너머 사회적 맥락에 더 집중해 보았다. 중간에 화면비를 열어젖히며 자유를 외치는 스티브, 나중에 구속복을 입다가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스티브를 보며 이 영화가 억압과 해방을 다룬다는 걸 느꼈다. 또한 스티브가 보여주는 성적인 행동과 이기심을 보며 이 영화가남성성여성을 다루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2. 장면 훑어보기.

 첫 장면에서 빨랫줄에 걸린 남성용 팬티가 나온다. 그 아래에서 팬티를 향해 디안이 손을 뻗는다. 다음 장면에서 그 손은 사과를 수확한다. 이는 아들(남성 팬티)을 향해 엄마(디안)가 추구하는 어떠한 수확(사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과나무를 살피는 디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수확할 사과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탐색하는 디안의 표정에 불안함이 느껴진다.

 이 불안함은 초반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디안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 소년원에서 사인을 할 때 열쇠다발이 불안정하게 달그락거리는 장면. 카일라와 인사하는 디안이 더럽혀진 창문 속에서 겨우 얼굴만 보여지는 장면. 마치 디안의 불안하고 절망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디안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해자를 향해너는 죽었다.’ 등의 언행을 보이며, 불운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원에서 나온 스티브는 디안과 동행한다. 디안은 스티브가 흡연을 못하게 막지만, 마지막 한모금을 스티브에게 나누어 준다. 이는 아들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스티브는 디안과 스티브를 쳐다보는 남자 청소년을 견제하며 디안의 팔을 감싼다. 이는 디안에 대한 스티브의 애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애착은 디안이라는주체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엄마라는 대상에 대한 애착으로 보여진다. 택시기사와 싸우는 장면에서 택시기사의창년이라는 발언에 발끈한 스티브는 차에 올라가서 침을 뱉는다. 그러나 그것을 말리는 디안에게까지 거친 언행과 행동을 하는 걸 볼 때 그의 분노가 엄마라는 대상을 위한 분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티브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 자기 방에 들어가서 빨간 커튼을 친다. 다음날에 빨간 커튼은 디안에 의해 수거된다. 빨강은 정열, 충동을 상징한다. 즉 스티브의 쉽게 흥분하는 특징과 활달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티브의 방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면, 그가 다양한 색깔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스티브는 현실과 관계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갇혀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안은 커튼을 걷는다. 스티브가 다양한 색깔과 관계하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디안이 찾는 수확(사과)일 것이다.

카일라의 일상도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일을 쉬고 있지만,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과도 제대로 관계하지 못한다. 가족 앞에서 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더듬을 뿐이다. 디안과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딸이엄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남편이카일라라고 부르자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역할이 아닌 오직 그녀의 이름에 반응하는 모습은, 카일라가 주어진 역할(엄마, 교사)에 피로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교사로 일했지만,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하고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피로가 느껴진다. 그녀도 스티브처럼 현실세계의 색깔과 관계 맺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엔을 만나면서 입이 트이기 시작한다. 물론 스티브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디엔의 부탁으로 일일가정교사로 스티브의 공부를 봐주려고 하지만, 스티브는 오히려 말 더듬는 카일라를 가르치려 하고 괴롭힌다. 이 관계는 카일라의 분노로 전복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스티브가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택시기사와 다투는 장면에서 그는 조금도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카일라의 분노에 공포를 느끼는 건 왜일까? 필자의 생각엔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에게 분노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디안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티브는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카일라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형편과 디엔의 상황을 생각해서 자신의 공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스티브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디엔과 카일라를 사랑하는 스티브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스티브는 그들과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디안을 위해 도둑질을 해서 물건들을 가져오지만 디안이 자신의 마음을 봐주질 않는다는 이유로 흥분하고 디안에게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의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디안의 목을 조르게 된다. 이렇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디안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게 된다.

또 그의 사랑하는 방식엔 관능이 빠지지 않는다. 해고당해 눈물을 흘리는 디안의 입을 틀어막고 틀어막은 손등에 키스를 하는 장면은,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인과의 사랑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카일라를 초대했을 때에도, 카일라와 디안에게 관능적인 몸짓을 보인다. 디안에게 관능적 스킨십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도 한다. 엄마와의 관계에서조차 그에겐 관능이라는 금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중에 디안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는 스티브가 디안에게 키스한다.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디안을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자유롭지만 폭력성과 부족한 고민으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영화에서 그의 자유를 막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이다. 중간에 피해보상금을 요구하는 청구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그러나 그 자유로부터 비롯된 불가항력의 장애물이다. S14 법안을 수용한 디안의 선택도 스티브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물이다. 사회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자유를 통제한다. 통제는 지나친 자유를 바로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청구서를 받은 디안은 폴의 법률적 도움을 받기 위해 몸을 치장하고 데이트를 한다. 폴이 디안과의 데이트를 즐기는 반면에, 디안은 어떻게든 폴과 소송 관련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의 행동들은 어쩔 수 없이 폴을 위해야 하면서도 어떻게든 폴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디안은 전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섹슈얼리티를 다른 남성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셈이다.

 수용소에 끌려가는 모습도 꽤나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스티브는 자신을 잡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선다. 그러나 그들은 스티브를 제압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전기 충격을 감행한다. 이에 디안은 스티브를 잡아가는 사람들을 욕한다. 디안은 통제하는 사람들이 스티브를 주체로 대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스티브는 구속복을 입게 되고 주체적으로 맺는 관계는 사라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브는 침묵을 하고 있고, 오직 그를 다루는 사람들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디안이 s14 법안을 선택할 정도로 스티브에게 바라는 건 그녀의 환상을 통해 드러난다. 스티브가 꿈을 이루고 짝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수확(사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스티브를 통제하는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통제를 스티브의 탈출하는 몸부림을 통해 부정한다. 스티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무엇일까?

 




3. 영화 분석하기.

 영화에서 디안, 스티브, 카일라가 모일 때, 그들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자유는 트라우마로 형성된 것들로부터, 장애라고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과 질서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엔, 카일라, 스티브는 각자 부족한 인물로 취급되지만 서로의 관계를 통해 자유를 보장받는다. 디안은 카일라와 의 도움으로 스티브에 대한 돌봄에 대한 수고를 덜게 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노동에 더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는 디안과 카일라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카일라는엄마로서가 아닌카일라로서 존재하게 되며, 말더듬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자유엔 한계가 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다시 억압으로 돌아간다. 스티브는 현실세계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스티브를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색깔을 지우려 하는 현실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스티브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을 훼손한다.

 스티브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특히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 할 때 그는 분노한다. 또 그는 여성을 관능의 대상으로 대한다. 카일라에게 추파를 던지거나자기야.’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 디안에게 유혹하는 몸짓을 하거나, 디안에게 키스하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도한다. Adhd 증후군이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스티브를 비정상적 아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렇게 낙인찍지 못 할 수도 있다.

우선 영화에서는 스티브, 디안, 카일라를 제외한 다른 사회적 관계들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거의 미시적인 세 사람들의 관계만을 보여줄 뿐이며, 그들이 왜 현재 이런 모습인지에 대해서조차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카일라가 어떤 사건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라는 상상을 할 뿐이며, 스티브가 어떻게 adhd 진단을 받고 어떻게 악화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그저 디안의 몇마디를 통해 가늠할 뿐이다.

그러나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들은 있다. 스티브의 행동들은 통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성성의 모습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모습,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을 때 보이는 분노, 자기 중심성,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남성성을 구성한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스티브의 행동을 사회적 맥락과 연결지으려는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디안이 치마를 입을 때, 스티브가 셀린 디온의 노래를 틀고 화장을 한 모습으로 춤을 출 때, 가라오케에서 놀림을 받을 때이다.

 디안은 보통 청바지를 입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디안은 네 번 치마를 입는다. 먼저 번역 일을 구하러 갈 때 그녀는 치마를 입는다. 여기에서 치마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서의 격식이 된다. 그리고 남성 상사가 있는 사무실에 갈 때 그녀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간다. 그러나 상사 대신 그의 아내가 그녀를 맞이한다. 그녀는 디안을 이쁜이라고 부르는 등, 디안을 상사에게 꼬리치는 여성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디안을 해고한다. 여기에서 디안은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여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안은 이쁜이라는 말을 사양한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이는 폴과의 데이트에서도 드러난다. 폴을 유혹하기 위해 열심히 치장하는 디안의 모습은, 원치 않는 가부장적 현실과의 불가피한 타협인 것이다. 오직 카일라가 집에 놀러올 때 시스룩과 치마를 입은 디안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멋을 내기 위해 그러한 옷을 입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간에 셀린 디온의 노래를 틀며 치장을 한 스티브는 꽤나퀴어스럽게 보인다. 매니큐어나 화장을 한 스티브는 통상적인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가라오케에서 그가 디안을 향해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에게 호모라는 놀림을 받는다. 이를 통해 필자는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이 스티브에게 향한다고 보았고, 스티브의 남성성이 어쩌면 현실사회에서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본래의 스티브의 정체성을 짓누른 결과물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사회는 스티브의 극단적인 모습을 통제하려 한다. 사회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본다.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회 내부의 염증은 남겨둔 채로 말이다.

 물론 이 영화가 그러한 부분들을 집중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필자는 그저 이 영화에서 나아가 왜 스티브가 그러한 행동을 하고, 왜 통제당하며, 그럼에도 자유를 향해 외치고 뛰어가는지에 대해 오늘날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추측해 본 것이다. 마지막에 스티브가 구속복에서 벗어나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벅차오르는 느낌을 준다. 스티브가 벗어나려는 통제는 사회적 산물이다. 스티브는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그러나 사회는 자신의 색깔을 포기하지 않는 스티브를 규정하고 변이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산물로부터 벗어나는 스티브조차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스티브도, 디안도 아닌 마미이다. 디안은엄마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더 정확히는 남편을 잃고 경제부양과 돌봄노동을 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스티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 물론 그녀는 스티브를 사랑한다. 그녀는 스티브가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엄마이다.

카일라는 오히려엄마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듯하다. 그녀는 딸아이의엄마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족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카일라와 스티브를 만나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소수자로 낙인 찍히는 그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존재감이 지워졌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안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카일라로서의 존재감을 완성시킨다. 다시는 교사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녀는 결국 기쁘게 스티브를 가르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영화는 두 엄마와 한 아들의 영화인 셈이다. 여기에서 아들은 타협하기 힘든 자기만의 색깔이 있지만, 사회에 의해 변이된 남성으로서의 아들이다. 한 엄마는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존중하고자 하지만 여러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나중엔 (현실을 거부하면서도 현실의 산물이 되어버린) 아들조차 버거워하는, 그러나 눈물을 씹어 삼키며 꿋꿋이 희망을 갖고 이겨내고자 하는 엄마이다. 다른 한 엄마는, 가족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감을, 전형적이지 않은 모자를 통해 다시 회복해가는, ‘엄마가 아닌카일라로서 살아나는 엄마이다. 이들 모두 사회로부터 비정상, 비주류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지만, 사회가 지워지고 그들만의 소우주가 형성될 때 그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4. 나오기.

 돌란은 이 영화를 통해 사회 속에서 낙인 찍히고 변이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내외로 얻게 되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본인의 통찰, 대안을 정리해서 제시하기보다는 성소수자로서의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끄집어낸 여러 감정, 느낌, 생각들을 풀어낸 멋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