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 워치는 산불 감시원이 되어 산을 둘러다니며 일을 하는 게임이다.

어드벤처 게임이지만 비주얼 노벨의 느낌도 있다.

이 게임은 정적이고 힐링이 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오직 무전기를 통해 맞은 편 감시원과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수다를 떨면서 하이킹을 하는 게임은 아니다.

주인공은 산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모험을 하게 된다.





게임의 시작은, 주인공 헨리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몽환적인 배경과 서정적인 음악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황색 텍스트를 클릭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다.





물론 단순히 이야기만을 진행하지 않고, 이야기를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

아마 선택에 따라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헨리라는 인물에 이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게임의 그래픽은 사실적인 질감보다는 애니메이션같은 질감을 가지고 있다.

부드럽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변화하는 환경과 날씨를 보는 맛도 있다.





중간 중간에 있는 물품상자를 통해 물품과 전단지, 쪽지를 얻을 수 있고, 지도 경로도 알 수 있게 된다.




주변 환경, 사물들과 입체적으로 조응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소한 사물들을 집어서 살필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지형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낮은 바위나 발판이 있는 특정한 절벽을 오르내리거나, 지지대가 있는 절벽에서 로프를 고정시켜 오르내릴 수 있을 뿐이다.

환경, 사물과의 상호작용은 제작자가 정해준 대로 해야만 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게임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맞은 편 감시대의 주인공과 무전기를 통한 대화를 통해

산을 돌아다니며 '걷는 것', 그리고 주변 환경을 '보는 것'에 집중 시킨다.

우리는 대화를 무시할 수도 있고, 원하는 답변을 선택해서 대화에 함께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게임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소설이다.

무전기를 통한 대화가 주인공을 돌아다니게 하고, 다양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해주며, 그것을 해결하도록 해준다.

이 게임은 모험을 하며 특정한 장면을 마주하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대화로 이끌어지는 비주얼 노벨인 셈이다.





볼륨이 짧다. 금방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다.

대화를 나누며 탐험을 하는 방식이 단조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을 보며 산을 거니는 걸 좋아한다면 이 게임은 괜찮은 게임이 될 것이다.


게임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꽤나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마지막 즈음에는 엄청 몰입하면서 게임을 진행했었다.


게임 스토리도 괜찮았고, 부담없이 즐기기에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숨겨진 엔딩도 있다.





명작으로 평가받는 바이오쇼크1을 내놓았던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바이오쇼크1이 해저도시를 그렸다면,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공중도시를 그린다.

배경은 1900년대 즈음으로, 미국 우월주의, 신권정치와 자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겉보기에) 유토피아적 세계인 컬럼비아이다.


바이오쇼크1의 해저도시 모습 


인피니트의 공중도시는 시리즈 1의 음침해 보이는 도시에 비해 굉장히 낭만적이고 화사하다.


도시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게임을 하면서 정말 많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또 단순히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고, 공중도시의 사회상을 미학적으로 잘 드러낸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종교적인 메시지들, 엄숙하고 웅장한 예술상과, 지도자를 효과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들.

그만큼 매 공간들이 섬세하고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다.

플레이하게 되면 아름다운 것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보여주는 장관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주로 대립하는 키워드는 인종과 자본주의이다.

유색인종은 죄인으로 취급받고 착취당하며, 심각한 불평등에 의해 노동자들은 삶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분노한 유색인종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권력자에 맞선다.



그러나 이 게임의 주인공인 부커 드윗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저 빚을 탕감하려면 여자를 데려와라.’라는 의뢰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누빌 뿐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되는 이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는 꽤나 충격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자면, 게임은 단순히 미국 우월주의, 자본주의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세계에 양자역학을 뒤섞는다.

그럼으로써 조금은 복잡하지만 지적 쾌감을 선사해주면서도, 하나의 독창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체험 시켜준다.

 


바이오쇼크 1의 형태를 따라가지만, 전투나 이동의 자유도는 줄어들고 직선적인 플레이가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또 활기있는 캐릭터를 지닌 엘리자베스와의 협력으로 적어도 외롭지 않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해석 (스포일러가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는 부커 드윗의 내면 세계이다. 부커는 콤스톡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해설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공중 도시는 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 이후로 세례를 받은 부커 드윗(콤스톡)이 세운 도시이다. (운디드 니란 백인 개척자들에 의해 벌어진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건을 말한다.)

결국 그는 미국 식민지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세례를 통해, 부커 드윗은 가해자로서의 드윗(콤스톡)과 피해자로서의 드윗(탐정사무소 드윗)으로 분열된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드윗이라고 묘사했다고 그의 가해자성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려 하는 건, 그를 오염시킨 사회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속죄의 의지가 있는 드윗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지나치게 평행우주를 넘나든 콤스톡은 생식능력을 잃고 부커 드윗의 딸을 훔쳐 간다.

경제난에 굴복한 부커 드윗은 뒤늦게 후회하고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여기에서 콤스톡에게 살해당한 루커스 남매는 콤스톡을 없애기 위해 부커 드윗을 콤스톡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루커스 남매는 공중도시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다. 그들의 과학적 동조가 자신의 신격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콤스톡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이후 양자단위로 쪼개져 평행우주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혼란스러운 드윗은 기존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공중도시의 존재와 거기에 가야 하는 자신의 이유를 수립한다.

결국 그가 찾는 건 그의 딸이였고, 그가 없애고자 하는 건 가해자로서의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진정한 속죄가 아니다. 다시 기억을 되찾은 그가 깨달은 건 콤스톡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콤스톡의 가능성, 즉 시대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하는 건 피해자로 대표되는 엘리자베스에 의한 죽음이다.


콤스톡이 그의 딸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딸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가부장적 존재이다.

오히려 딸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개조하려 하고 훈육하려 한다.

게임에서 보여주는 콤스톡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애나는 콤스톡의 손에 들어갈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탈당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굉장히 염세적으로 게임은 끝나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탐정사무소에서 드윗이 애나를 찾는 숨겨진 장면이 나온다.

(게이머의 상상에 엔딩을 맡기겠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보인다.)

필자의 입장에서 부커 드윗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속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그의 철학, 삶의 양식을 벗어 던지는 행동,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익사할 때, 무수한 평행세계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진다.

콤스톡의 가능성이 지워지자 콤스톡 세계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엘리자베스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딸 애나를 키우고 있는 가난한 탐정 부커 드윗으로 돌아가게 된다.

위대한 개척자 가부장적인 백인 미국인을 지워내고,

부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드윗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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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킬링타임으로 괜찮은 게임이 있다.

손가락 하나만 휘적휘적거려도 즐길 수 있는 슈팅게임이다.




메인화면이다.

손가락으로 스와이프 해서 캐릭터를 움직여서 아이템도 장착하고 캐릭터도 바꿀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서 어떤 선을 넘어가면 게임이 시작된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캐릭터가 움직여야 시간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교한 컨트롤로 적들을 피하고 죽일 수 있다.

물론 한없이 가만히 있으면 뒤에서 세계가 소멸하기 때문에 곧 게임오버가 된다.



몬스터는 다양하다. 닭, 개구리, 펭귄, 헬리콥터, 트럭, 탱크 등등..

옆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캐릭터를 마주보고 오기도 하며, 뒤에서 다가오기도 한다.

주로 검정색인데, 연두색은 죽으면 돈을 떨어뜨리고, 파란색은 죽으면 아이템을 떨어뜨린다.



저 아이템은 게임을 진행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랜덤으로 무기를 장착해주는데, 더 막강하고 많은 적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먹어야 한다.



가끔씩 보스도 등장한다. 빨강색은 주인공을 계속해서 쫓아온다.

잘 피해서 보스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크기가 큰 만큼, 체력도 많다.


보스 말고도 빨강색 적이 존재한다.

가끔은 이 적들이 멋진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게임머니를 지불해서 아이템을 장착할 수 있다.

게임머니는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현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게임머니로 다양한 캐릭터도 살 수 있다.

캐릭터를 영구히 사용하는 건 아니고, 캐릭터를 쓸 수 있는 횟수를 얻게 된다.

캐릭터별로 다양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바꾸는 게 유리하다.


물론 현금을 내야 플레이 할 수 있는 캐릭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캐릭터는 특별 선물로 제공되어 잠깐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캐릭터를 바꿔서 플레이 하는 모습이다.

이 캐릭터는 사방으로 하늘색 총알 두방을 각각 내보낸다.

그밖에도 다양한 효과를 가진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어느 조건을 충족하면, 새로운 캐릭터 박스와 아이템 박스가 열린다.

게임머니를 지불해서 캐릭터를 사고 그 효과를 체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캐릭터가 죽으면, 시간이 느려지면서 게임 오버 화면으로 전환한다.

캐릭터가 폭발하면서 파편이 튀는 장면은, 죽은 당시의 모습을 멋들어지게 보여준다.


이 게임은 나름대로의 중독성이 있다.

뒤로 갈 수록 더 다양한 적들을 만나게 되고

보라색의 변종 적들은 난이도를 더 어렵게 만든다.

중간중간에 캐릭터를 가로막는 다양한 건물들은 덤이다. (물론 가끔 나오는 파란색 건물은 무척이나 반갑다.)


아이템을 많이 먹을 수록, 더 강하고 많은 적들이 나올 수록,

게임은 치열해지고 통쾌해진다.


킬링타임 용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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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룸에 봉준호가 나왔다. 역시 예상대로 손석희는 대형 멀티플렉스의 옥자상영 거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봉준호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봉준호는 예술인으로서 영화가 유통되는 과정에 대한 견해보다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필자도 처음엔 궁금해 했다. 왜 봉준호는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야만 했을까? 기사를 찾아보니, 봉준호는 배급 문제보다 창작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해 더 집중한 것 같다. 보통 거대자본이 투자될 때엔, 그 투자자의 입김이 분명히 감독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600억원의 금액을 투자했음에도 봉준호에게 전적인 권한을 위임해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넷플릭스는 봉준호라는 예술인을 존중해준 것이다. 또 봉준호의 발언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대자본이 들어간 영화에서 투자자의 입김이 무시될 수 없는 세계가 영화계라는 걸 알 수 있다.

 가령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마지막 즈음에 나타나는 신파적 장면으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연상호스럽지 않다.’고 비판했고, 필자 역시 블록버스터 대중영화를 만들기 위한 연상호의 타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역이라는 프리퀄을 별도로 만든 건 아닐까?)

 어쨌든, 필자는 넷플릭스라는 투자자가 봉준호라는 감독을 존중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물론 영화가 특정 기업의 영향 아래 탄생한다는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들은 제작사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저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스트리밍 제작사가 나타났을 뿐이다.

 




넷플릭스 제작의 옥자가 국내 영화시장의 질서를 교란시킬까?

필자는 이미 한국의 영화시장의 질서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cgv는 독점 개봉이라는 형태로, 오직 자신의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cj 제작 영화가 개봉할 때, 같은 계열사인 cgv는 해당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준다. 대표적인 예로, 1000만 영화 명량은 과도한 스크린 독점으로 다른 영화들의 상영 기회를 줄이기도 했다. cj 제작 영화가 개봉하지 않아도, 다양성 영화의 상영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따라서 동네에서 다양성 영화를 보지 못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대중이 주로 무엇을 소비하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현재 cgv는 돈독이 오른 모양인지 좌석 차등제를 실시하고 있다. 소위 명당 좌석에는 더 높은 가격을 책정기로 한 것이다. 10분동안 광고를 틀어주는 cgv가 아직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의 거절을 받고도 옥자는 개봉을 할 예정이지만, 오히려 필자는 옥자의 개봉이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낼 거라고 긍정하고 있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도 최종적으로 상영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옥자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대한 극장과 같은 여러 다양한 극장에서 개봉을 한다. 그동안 대형 간판에 가려진 극장들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천에는 반경 1km의 공간에 대형 멀티플렉스가 6곳이나 있고, 강남역 부근에는 7곳이나 있다. 마치 프렌차이즈 편의점이 과하게 들어서면서 슈퍼마켓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꼴이다. 하지만, 유명한 봉준호의 신작이 대형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다양한 극장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봉준호의 말처럼 옥자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극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개봉하는 것이, 극장 영화 문화에 영향을 끼칠까? 아니다.

 이미 스트리밍 영화 시청 문화는 이전부터 꾸준히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우리는 높은 금액을 내지 않고도 핸드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지하철, 버스와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스트리밍 방식은 또 하나의 취향일 뿐이다. 특히 바쁜 일과로 여유가 없는 학생, 직장인들에게 스트리밍 서비스는 접근성 또한 높다. 일상에 더 가까워진 형태의 문화소비 형태는 오히려 여유 없는 일상 속에서 잠깐의 틈새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스트리밍 서비스는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영화관을 즐길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일단 필자 같은 영화광은 영화관을 찾을 것이다. 캄캄한 상영관, 거대한 스크린과 공간을 울리는 스피커는 영화를 감상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다. 오직 영화관에서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여줄 수 없는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영관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스피커의 구성, 아이맥스같이 눈을 가득 채우는 스크린의 극대화는 여전히 관객을 영화관으로 유혹한다. 가령 인터스텔라가 개봉할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이맥스관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어떤 영화는 거대한 스크린과 상당한 볼륨의 스피커 없이는 온전히 즐기지 못할 수 있다.

 물론 영화관은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오락 코스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 극장을 찾지는 않는다. 삶의 여가로서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3d 상영관, 4d 상영관, 자동차 극장과 같은 형태는 영화가 오락의 수단으로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더 제대로 된 몰입을 위해 3d로 봐야 할 영화들도 있기는 하다.) 무엇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광활한 초원이나 우주를 티비나 스마트폰으로 보려고 할까? 영화관보다 스트리밍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스트리밍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여유 없는 사회적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항상 극장에서만 개봉되어야 할까?

 글쎄..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고, 극장이 아닌 형태로도 개봉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뉴스룸에서의 봉준호의 말마따나 새로운 흐름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과의 충분한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트레일러



림보의 제작사, playdead에서 2016년에 신작을 내놓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횡스크롤 어드벤쳐이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역시 구체적인 세계관이나 엔딩에 대한 제작사의 설명은 없다.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상상해서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걸 유도한 것 같다.



playdead의 첫작품인 림보

 


난이도는 림보보다 더 쉽다. 게임을 진행하는데 더 수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림보보다 더 다양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연출들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림보가 이 게임의 알파버전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만큼 이 게임은 촘촘하고 완성도가 높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자가 설계해 놓은 게임의 미학적 요소들에 흠뻑 취해 지루할 틈을 느낄 새가 없다.





이 게임은 종적 공간이 존재하는 횡스크롤 게임이다.

플레이를 하다보면 배경을 이루는 움직이는 트럭넓게 펼쳐진 풀밭 등등 다양한 공간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공간을 완전히 돌아다닐 수 없다. 그저 배경 속에서 횡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럼에도 종으로 펼쳐진 공간은 게임 연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횡으로 움직이는 게임과 입체적으로 조응한다.


 



이 게임은 기괴하다.

림보보다는 어느정도 색채가 추가되었으나, 여전히 칙칙하다.

구제역을 연상케하는 돼지들, 돼지에 붙어있는 구더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인간 조종장치, 중력을 거스르는 물의 존재, 그 물에 잠겨있는 사람들은 기이한 분위기를 띠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끊임없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또한 비일상적이고 독특한 특유의 기괴한 요소들로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만의 정체성은 확실해진다.

 




이 게임은 극적이다.

게임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꽤나 원초적이다.

우리는 어떠한 스토리 텔링도 없이, 미장센으로 보여주는 단서들과 주인공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토리를 예측하게 된다.

이 게임은 그러한 원초성을 잘 이용한 모양이다. 필자는 플레이하면서 벅차오름, 공포, 전복의 카타르시스, 연대감을 느꼈다.

단순하지만 적절하게 작곡된 음악은 적절하게 그러한 감정을 잘 유도해주었다.

현악기의 울림, 타악기의 적절한 비트감이 특정 상황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을 극대화 시켜준다.

 




후반부는 꽤나 충격적이었고, 히든엔딩과 그에 대한 해석도 꽤나 인상깊었다.

플레이타임은 짧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반복되는 플레이에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데, 이 게임에서는 그러한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복보다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미장센과 상호작용, 연출 등으로 플레이어를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문화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트워크,

가난하다고 문화를 모르겠는가.’에서 공연관람을 지원해준 덕분에

4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달밤이라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공연을 펼친 극단 시지프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소설에서 다루는 부조리함을 이 극단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 같았다.

달밤은 한국의 소설가 이태준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연극이다.





이태준은 한국의 모파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큼 완성도 있는 단편 소설을 썼던 소설가이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었으며, 월북하였으나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 받았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극단에서는 소설가 이태준을 투쟁과 개혁이 아닌 민중에 대한 연민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극단이 다루는 이태준의 소설이 자전적 소설인 만큼, 연극은 성인이 된 이태준의 삶 전반을 다룬다.

연극을 통해 소설가로서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역사의 풍파 속에서 느끼는 고통을 엿볼 수 있다.

이 연극은 무엇보다도 덜떨어진사람으로 취급 받는 신문 배달부 황수건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초역할로 다가오겠지만, 나중에는 연극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극을 많이 보지 않아서 일까?

필자에게 이 연극은 매 순간이 마법 같았고, 그래서인지 여운도 짙게 남은 것 같다.

영화에서는 정해진 시선을 통해 투사된 이미지 상을 바라볼 뿐이라면,

연극에서는 구체적인 공간들을 나의 시선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주인공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연극이라는 매체가 가져다 주는 생동감과 생생함이

달밤이 전달하고자 하는 슬픔을 더 현장감 있게 전달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다.


연극은 끊임없이 부조리를 보여준다. 적어도 초반에는 나름대로의 낭만이 묻어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러한 낭만은 일제의 폭력과 이념의 폭력에 의해 변질되고 사라진다. 연극 초반에는 이태준 본인이 내레이터를 자처하며 관객에게 연극 이야기를 스스로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갖은 폭력에 시달리면서 그는 어깨를 움츠린 노동자, 묵묵히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가 되어버린다.

그가 부조리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을 그리는 방식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폭력을 받았는지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저 연극 초반의 장면이 재현될 뿐이다. 그 장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느꼈던 시골 장면이다. 하지만 시골은 온갖 변질된 소음들로 인해 무너진다. 신파적 요소는 없지만 필자에게는 가장 처절하고 슬픈 장면이었다. 혼란 속에서 이태준은 고통스러워하고 절규하다가 힘을 잃고 북한 간부에게 끌려간다. 그에게는 눈물을 흘릴 여유와 힘이 없었다.

형벌을 받는 시지프가 되었으나, 그는 다시 황수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내레이터를 자처하며 뒷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는 항상 감초 역할을 했던 황수건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이태준이 쓰고 있는 소설의 한 구절로 연극은 끝난다. 그 구절은 황수건을 향한 그의 눈물이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 하였다.’

 어쩌면 이태준은 황수건 만큼은 변하지 않았음을, 아니 변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황수건은 덜 떨어지고 능력 없는 사람으로 가치평가를 받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쓸쓸히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고 있다. 연극은 현실 세계와 이태준의 세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시종일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어준 황수건마저 무너뜨린다.

 하지만 필자에게 이 연극이 단순한 비극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의기소침했던 이태준이 기꺼이 쓸쓸한 황수건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황수건에 대한 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부조리에 대항하여 설움을 알리고자 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그가 쓴 달밤도 결국 시지프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함께 흘리는 눈물이며, 부조리로부터 추동하기 위한 발판인 것이다. 그래서 연극은 쓸쓸하게 끝을 맺지만, 그 쓸쓸함과 애달픔은 부조리로부터 일어서기 위한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인 것이다.

 정말 좋았다. 원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암전이 되고 여운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바로 커튼콜을 위한 조명이 켜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운을 더 음미하지 못한 채 어설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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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청년' 프레스콜을 봤다!  (0) 2017.05.26


킬링타임으로 중독성 있는 게임 뭐 없을까 해서 이 어플 저 어플을 뒤져보았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디펜스 게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111%라는 양질의 다양한 게임들을 만드는 회사의 어플이었다.

예전에 몇몇 게임들을 해봤지만 필자와 맞지 않아 반신반의하면서 어플을 다운받았다.




시작 화면이다. 굉장히 단순하다.



저 바둑판 위에 생기는 아이콘이 바로 적들을 막는 방어탑이다.



턴이 끝날 때마다 돈을 벌 수 있다. 돈으로 방어탑을 살 수 있는데, 랜덤으로 뽑힌다.


종류는 총 여섯가지다.

빨강은 폭발을 일으켜 사정거리 내의 모든 적에 데미지를 주는 타워

노랑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여러개의 적들에게 동시에 타격을 주는 타워

파랑은 적을 느리게 만드는 타워

초록은 독으로 적을 중독시키는 타워

검정은 특정 확률로 적을 바로 없애버리는 타워

회색은 두배 이상의 속도로 공격하는 타워


턴이 끝날 때마다 적이 늘어나고 체력이 많아지며, 벌 수 있는 돈도 10원씩 늘어난다.



만약에 같은 색의 타워가 두개 있다면,



이렇게 합쳐서 두칸짜리 타워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타워 하나에 공격지점이 두개 생기는 셈이다.


유의해야할 점은, 두개짜리를 합칠 때, 4개짜리가 아니라 3개짜리가 된다는 것이다.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머리를 쓰면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처음엔 어렵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76턴도 금방 깰 수 있다.


매 10턴마다 보스가 나온다. 체력이 상당히 많아서 쉽지가 않다.






결국 보스전에서 죽어버렸다.


개인적으로 이 어플은, 초반에는 어려울 수 있는,

하지만 어느 정도 요령을 익히면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이다.


초반 요령만 어느정도 숙지한다면, 그 다음엔 스스로 전략을 구상하면서 게임을 할 수 있다.



초반 요령을 공유하자면,

약 10턴까지는 타워들을 계속해서 구매한다.

구매하다보면 갯수가 많은 특정 타워가 보일 것이다.

이때 그 타워의 공격력을 업그레이드 해준다.

(화면 아래의 칸이 공격력 업그레이드 칸이다.

업그레이드 하다보면 공격력 뿐만 아니라 해당 타워의 능력도 조금씩 업그레이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타워를 제외한 다른 색깔들을 서로 합친다.

어차피 1개짜리를 합치는 건 전체 공격력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손해보는 건 없다.

업그레이드 하면서 갯수가 많은 타워를 최대한 생산하도록 한다.

그런 식으로 같은 종류의 타워를 많이 생산하면서, 그 타워의 공격력과 능력을 업그레이드 해주면 된다.

불안하다면 타워 두 종류를 적당한 비율로 늘리면서 키울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킬링타임을 원한다면 이만한 어플도 없을 것이다. 꼭 플레이 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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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타임 락커 (Time Locker)  (0) 2017.06.29


블로그를 하는 친구 덕분에 불량청년이라는 연극 프레스콜을 보게 되었다!

프레스콜이란, 정식 공연을 하기 전에 기자들을 초대해서 하는 공연을 말한다.

기자 뿐만 아니라 여러 블로거들도 초청받았는데, 그 중 내 친구도 2인 초대를 받아서 나도 함께 갈 수 있었다.


보니깐 제 3회 서울연극인 대상 대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극장 앞에는 연극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시간이 애매해서 음료를 시키진 못했다.



연극을 많이 보지 않았던 필자에게 이 연극은 정말 멋졌다.

불량청년은,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한 청년이, 독립투사 김상옥이 활동하는 일제 강점기로 타임워프를 하는 내용의 연극이다.


연출가 분은 나름대로 이 연극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연극은 엄청 유쾌하게 그려지고, 또 감동적으로도 그려진다.



 일제 강점기에서 자신의 목숨을 불사하는 사람들도, 결국 인간 존엄을 위해 투쟁하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현재 한국 청년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무엇일까?

이육사의 광야를 거듭 낭송하며 강조하는 초인됨의 모습일 것이다.

초인이란, 사회의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을 말한다.

생존을 위해 힘겹게 노력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만 하는 체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일 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그러한 상상력의 좋은 동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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