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라면 안 좋은 추억이 있을 수도 있는, 몽타주의 시초이자 명작으로 평가되는 영화, ‘전함 포템킨을 보게 되었다.

진중권의 디지털미디어 미학 강의를 듣다가,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가 예시로 나오길래 호기심에 구매해버렸다.

(따라서 필자는 진중권의 디지털 미디어 미학 강의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인용해서 이 글을 썼다는 것을 명시하겠다.)





이 영화는 소련의 공산주의 선동 영화다.

이념 갈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독재에 의해 고통받는 인민의 연대라는 점에서는 공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영화인 만큼 지루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하기에는 인상깊은 장면들이 꽤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도 우리에게 긴장감과 벅차오르는 감정을 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옛날 한국에서 상영하는 방식처럼, 변사가 영화의 줄거리를 신명나게 읊어주었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이다. 그렇다 보니 중간 중간에 대사들이 텍스트로 나온다.)





 사실 '전함 포템킨'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몽타주 기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몽타주 기법을 효과적이지 못하게 쓴 것은 아니다.

영화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인민 탄압의 참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전함 포템킨이 반격할 때의 쾌감과 그리고 전함들과의 대치 장면에서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개인적으로 몽타주 기법을 통해 사자상이 일어나는 형태를 표현하는 장면은 꽤나 중의적으로 읽혔다. 분노하는 전함 포템킨의 포효일 수도 있고, 민중의 반란에 놀란 고위층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오데사 계단 장면을 꼽을 수 있겠다.

계단을 내려오는 군인, 그들로부터 도망가는 인민,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타나는 특정 인민들의 모습들까지의 장면들은

끊임없이 몽타주 기법으로 제시된다.

대립적 장면들의 충돌로 관객은 그 둘 중 하나에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동안의 예술이 구성되는 방식이 인과관계가 뚜렷하고 끊임이 없이 전체성을 이루는 유기적 구성이었다면,

영화는 파편화된 장면들의 끊임없는 충돌로 기존의 예술의 방식을 전복시킨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학자는 이러한 파편화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영화가 현실세계로 확장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객은 몽타주 기법을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선동적 영화는 좋은 영화일까?

필자에게 선동은 영화의 특징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중이 납득할만한 논증이 부재하는 선동은 비판받을 수 있고, 영화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선동은 양면적이다.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라는 영화는,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영화로 평가받는다.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 영화가 히틀러를 뛰어나게 미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의 공식이기도 하다.

정치를 유미화하는 방식. 전쟁에서 보여주는 미학을 향유하고 나치즘이 가져온 현실을 포장하는 방식은

세계를 위협했던 파시즘의 생각이었다.

선동적 영화가 뛰어난 영화라면, ‘의지의 승리역시 뛰어난 영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선동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선동의 존재 여부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선동영화를 평가해보고 싶다.

높은 가치로 평가되는 영화는 특정한 특질을 이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전달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가 대중과 관계맺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의지의 승리는 영화 자체로는 잘 만든 영화이지만,

누군가는 끔찍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하며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승리가 어떤 대중과 관계맺는 방식이며 영화가 저평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가령, 이슬림 테러단체 is를 찬양하는 멋진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보자. 훗날에 영화사적으로 평가받을 지는 몰라도, 현재의 우리들은 결코 영화를 윤리적 관점과 분리시켜 평가하지 못 할 것이다.)

 

물론 '전함 포템킨'이 '의지의 승리'와 차이를 두는 지점이 있다.

파시즘이 정치를 예술화할 때, 공산주의는 예술을 정치화 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몽타주 기법은 파편화를 통해 관객이 영화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영화에 거리를 둠으로써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영화를 통해 이념을 부여한다. 독일의 많은 미학자들도 예술을 통한 정치참여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오늘날 보편화된 몽타주 기법에 의해서 영화에 거리를 두는 대중은 드물다.

이미 대중은 몽타주에 체화된 관객이다.

오히려 어떤 이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 전함 포템킨이 준 영화사적 전환, 정치적 기여는 그 당시에는 신선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기여는 그 시대에 한해 효과를 발휘한다.

오늘날에는 분명히 그 한계가 존재하며, 변화한 시대상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아도

이제 전함 포템킨은 오늘날 대중들에게 독특한 영화로 소비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분명 존재한다.

영화가 가진 장면의 독창성 또한 존재한다. 또한 배경지식을 알고 영화가 기여한 성취를 찾는 재미도 분명히 존재한다.

(유모차 씬을 염두해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은 다른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새로움을 못 느낄 수도 있겠다.)

때문에 고전영화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향유될 수 있다.

전함 포템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전함 포템킨에 담겨있는 영화적 분석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연출을 감상한다면, 충분히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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