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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라는 단어가 아닌, '임신중절'이라고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낙태'라는 단어가 산모보다 태아중심적으로 사용된 단어로, 자극적인 의미를 이용해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원인을 여성에게 귀속시킬 우려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봉한 ‘24라는 영화를 보았다. 보면서 많이 울었고, 임신중절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임신중절을 다룬 다른 영화를 찾아보았고, ‘4개월 3주 그리고 2더 월이라는 영화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필자가 성교육시간에 배웠던 '낙태'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우리가 흔히 학교의 성교육 시간에서 보았던 '낙태' 관련 영상은, 1984년에 제작된 소리없는 비명이라는 영화의 입장과 일치한다.

, ‘태아의 인권은 무시될 수 없다.’는 입장. (필자는 2010년 즈음에 성교육을 받았다.)

소리없는 비명은 보지 않았다. 대신 소리 없는 비명위키피디아 링크를 첨부하도록 하겠다.

거기에 이 영화를 둘러싼 많은 비판들이 있을 것이다.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소리없는 비명_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A6%AC_%EC%97%86%EB%8A%94_%EB%B9%84%EB%AA%85

 

필자가 세 임신중절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건, 성교육시간에 들어보지 못했던 산모의 이야기였다.

또 임신중절을 대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임신중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24주

24주는 2016년에 독일에 개봉한 영화이다.

독일은 임신중절 합법 국가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임신중절에 관한 섬세한 고민과 배려가 엿보였다.

이 영화는 ‘임신중절’이라는 고민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 어떤 괴로움에 봉착하는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주인공 아스트리드를 따라서 그 여정에 함께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의 포스터에서 아이가 들어있는 배를 껴안는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영화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아스트리드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때 아이가 겪어야 할 고통과 그걸 마주해야 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본다.

영화에서 그녀가 장애인 아이를 낳는다는 이미지는 극중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다가가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가 외치는 건, ‘만약 내가 아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이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개월 3주 그리고 2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임신중절을 결정한 여성의 친구가 되어 친구의 임신중절을 돕는다.

영화는 롱테이크 기법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을 체험하게 한다.

그 체험은 단순히 임신중절에 관한 체험이 아닌, 여러 상황 속에서 불안, 공포, 수치심 등등을 느껴야 하는 여성에 관한 체험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에 처한 상황과,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행동에 숨막힘을 느낄 것이다.


‘24가 감각적인 연출을 보여주며 관객을 울린다면,

‘4개월 3주 그리고 2은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사실적인 연출로 관객을 힘겹게 한다.

심지어 영화 배경음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더 월 (If These Walls Could Talk)

더 월 1996년에 개봉한 영화다. 꽤나 아득한 시기인데, 미국사를 참고해보면 그 당시 임신중절에 관한 논란은 뜨거웠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도 엿볼 겸, 전설적인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임신중절을 주제로 1996년에 코미디 공연을 한 영상을 첨부하고자 한다.





더 월’, 영어 제목으로는 ‘if these wall could talk’이라는 영화는

1952, 1970, 1996년의 이야기들을 동일한 단독주택에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룬다.

필자가 추론하기로는 wall은 여성을 의미한다.

만약에 벽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은

임신중절이라는 의제를 다룸에 있어서 당사자 여성들이 배제되고 존중받지 못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본다.

결국 이 영화는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의 이야기의 보고인 셈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시대에 따라 다른 임신중절 환경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여성이 임신중절에 대해 갖는 상황과 고민은 공통적으로 현대에 유효했다.

에피소드 1에서 막대한 금액 때문에 열악한 임신중절 시술을 받아야만 하는 주인공의 상황은

임신중절을 불법화하는 한국의 '낙태법'과 어마어마한 시술비를 내야만 하는 한국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특히, 에피소드 2에서 그리는 모습은

임신중절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당사자 여성의 의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다가, ‘너무 자극적인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임신중절과 여성운동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에서 필자가 보았던 자극적인 연출은, 실제 미국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라고 한다.


결국 이 영화는 단순히 ‘임신중절에 찬성해야 한다.’고 외치기보다는

임신중절이 개개의 상황들과 당사자들의 의사를 고려하는 과정 속에서 존엄한 삶을 지킬 수 있기 위한 가능성으로 존재해야 함을 외친다.

결국 임신중절은 누구도 섣불리 판단하고 금지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들은 임신중절 문제에 있어서 소외되고 수많은 위협과 부담감에 노출되는 여성의 모습이다.

동시에 임신중절은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남성 역시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체로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성들은 임신중절을 마주한 여성의 입장보다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행동한다. 혹은 적극적으로 문제에 함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누군가의 삶의 존엄성을 위해 보장되어야 하는 임신중절의 가능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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