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완성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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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년 전 미학 수업에서 제출했던 과제를 다시 다듬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논문, ‘모바일 미디어와 공간적 실천 -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 중심으로 –, 문안나를 참고하여 썼습니다보톡스 샬롱 씬’, ‘젭의 집에 대한 분석, 그리고 젭의 걷기.’ 행위 아이디어는 위 논문에서 가져왔습니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 - The Beatitudes



1. 들어가기.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2014년에 개봉한 영화로, 201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영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세련된 음악과 함께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수려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간단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의 주인공 젭은 인기 작가이자 유명인사이다. 물론 젊었을 때 소설 한 권을 쓴 이후로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그는 상류 사회에서 유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상류 사회에서도 최고가 되길 원하며, 최고가 되어서도 파티장을 무력하게 할 정도의 아우라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점점 그는 자신의 삶과 주변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떠나고, 아무도 그를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한다. 그러던 중, 성녀를 초청한 파티장에서 성녀를 만나게 되고, 성녀는 젭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암시해 준다. 마지막에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 감성, 감정, 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 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영화는 다양한 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어, 욕망, 과시와 같은 허상으로 존재하는 껍데기들, 예술이라는 형식을 지닌 작품들, 성스러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그것들을 일종의 재료로 활용하여 감독은 차근차근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하여 전달한다.

영화는 주인공인 젭이 걷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걸으며 다양한 일상들을 감상한다. 장면 장면마다 젭은 ‘감상자’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영화에서 우리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 시선에는 상류 사회의 삶에 대한 염증, 혹은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묻어있다.

 




2. 장면 분석하기.

영화는 로마의 아름다운 건축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으나, 그 곳의 주민들은 조각상 옆에서 책을 읽거나 물로 손을 씻으며 주체적으로 공간과 관계한다. 그 뒤에 일본인 관광객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로마의 건축물은 관람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을 찍는 일본인 한 명이 쓰러진다. 그들의 관광이 일시정지되며 사람들이 몰려든다. 관광객의 졸도로 관람의 대상으로만 남았던 그 공간은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비명소리와 함께 장면은 파티장으로 옮겨진다. 파티장 연출에서도 흥미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파티장의 스트립걸은 쇼윈도 안에서 음란한 복장으로 관능적인 춤을 춘다. 유흥에 빠져버린 파티 참가자들에게 스트립걸은 그저 관음증적 대상일 뿐이다. 스트립걸의 파티 참가자들에게 소유된 쇼윈도라는 공간에서 구체적 관계는 단절되었다. 오직 특정 목적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쇼윈도를 바라보는 파티장에 머물지 않고 쇼윈도 안으로 들어간다. 파티장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사라지고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스트립걸이 몸짓하는 소리만 들린다. 이 순간 쇼윈도는 관음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스트립걸의 구체적 일상에 침투한 것이다. 이 때 쇼윈도는 관계가 단절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 된다. 물론 거시적으로 스트립걸의 삶은 관중의 욕망에 의해 구속되어 있겠지만 그럼에도 스트립걸의 구체적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중년 스트립걸과 관련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산책을 하는 젭은 매우 독특한 건축물에 도착한다. 그는 아이를 찾는 엄마를 지나쳐 돔형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출물 한가운데에 있는 바닥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은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젭은 그 사이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젭을 비춘다. 아래에서 아이가 누구냐고 묻는다. 젭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참, 아무도 아니지.’라고 말한다. 당황한 젭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 길을 걷는다. 젭은 지상에 있고, 아이는 지하에 있다. 철조망은 무언가를 가두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아이를 가두고 있는 건지 젭을 가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지하의 아이의 목소리는 지상을 걷는 유명인사를 무력케 한다. 젭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무수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어떤 아이에 의해 무력화된 것이다. 카메라는 결코 지하의 아이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온갖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길들여지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녀는 결코 젭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언어적 발화행위는 언어로 점철되어있는 잡담 속 젭을 뒤흔든다.

이제 젭은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스트립걸을 만나게 된다. 스트립걸을 만나기 전에 카메라는 두 명의 여성들을 통해 현대의 슬픈 여성상을 보여준다. 리무진 안의 슬픈 창녀, 히잡을 쓴 슬픈 여성, 이들은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에 의해 대상화되고 소유되는 ‘여성’으로 드러난다. 다시 카메라는 친한 친구를 만나 룸으로 들어가는 젭을 따라간다. 그는 친한 친구의 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50대 중년 스트립걸로, 지적인 스트립걸을 꿈꾸고 있다. 스트립걸 활동으로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나중에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진다. 그녀는 전형적인 형태의 가정을 꾸리는 걸 거부한다. 애초에 결혼에 대한 욕심이 없다. 스트립걸로서 그녀의 몸을 영화는 매우 관능적이게 보여주지만, 대화 속 그녀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만큼 대상화되지 않는다. 멀리서 그녀는 대상화되는 창녀이지만, 그녀의 구체적인 삶은 대상화되지 못하며, 오히려 욕망을 취하는 관중들보다도 주체적이다.

젭은 보톡스 시술을 하는 샬롱에 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오직 시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 시술사가 주도하는 대화조차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한 도구적 발화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샬롱은 젊음에 대한 욕망이라는 목적에 의해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 때 다한증이 심한 수녀가 그곳을 찾아온다. 수녀의 등장은 젭의 이목을 끈다. 수녀에게 기도해달라 말하는 시술사의 모습은 위화감이 든다. 수녀라는 성스러움은 자본주의의 옷을 입은 인간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 것이다.

감정 역시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젭은 중년 스트립걸을 파티장에 초대한다. 파티장에서는 여러 예술공연들이 진행중이다. 그리고 어떤 소녀가 벽에서 페인트칠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다. 공연을 하기로 한 소녀가 친구들과 놀고있는 걸 본 어른들은 친구들을 내쫓으며 소녀를 재촉한다. 수의사가 꿈인 소녀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지만 결국 어른들에게 이끌려 무대로 향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어린 예술 소녀의 행위는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온갖 페인트들을 진흙처럼 뭉개고 절규하며 달려드는 소녀의 몸짓은 그녀를 이용하려는 어른들에 저항한다. 그렇게 흰 벽은 온통 진흙 색 페인트들로 뭉게진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결과물은 다르게 나타난다. 갑자기 벽은 소녀가 칠해놓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된 것이다. 구체적 경과를 떠나서 이러한 장면배치는 방금까지의 서럽고 슬픈 소녀의 저항을 무색케 한다.

젭이 감상하는 성스러움, 감정, 즉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그러나 젭 본인은 오히려 그러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적 질환을 가졌던 어느 청년의 죽음으로 장례식이 열린다. 젭은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중년 스트립걸에게 알려준다. 젭은 왕처럼 어느 넓은 의자에 앉아 중년 스트립걸의 장례식 예복을 점검해준다. 중년 스트립걸은 넓은 무대 위 조명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평가받으며, 한구석에 자리잡은 진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이 이미지는 격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례식장에 가기 위한 옷을 갈아입는 공간임에도, 집 한 채가 될만한 규모의 공간에서 한 명의 여인이 옷을 고르며 젭에게 평가받는다. 젭은 평가자로서 그녀를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알려준다. 그 공간에서 감정이 오가는 장소로서의 장례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오직 장례식이라는 커다란 사교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위해 존재하는 비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 장례식장에서 젭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는 격식을 차리며 행동하려 하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죽은 청년의 친구가 관을 들기로 하지만, 애초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청년의 관을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다. 결국 젭과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관을 드는데, 몇 걸음 걷다가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장례식 예복을 갈아입었던 공간에서 그는, ‘장례식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유가족의 슬픔을 빼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실례’라고 말했었다. 젭의 격식은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젭이 오직 상류사회만을 걷는 건 아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공간을 걷는 행위도 영화에서 나타난다. 가령 그는 양로원 같은 공간에 들른다. 그곳에는 노인들이 모여 한가로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 공간은 주체들의 구체적인 행위로 일상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갑자기 한 노인이 젭을 향해 묻는다. ‘누가 당신을 돌봐주죠?’ 그 말에 젭은 생각에 빠진다. 그가 꿈꿔왔고 즐겨왔던 일상이 허상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몸담은 상류사회에서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성찰이 없는 여흥만 존재하지만, 보잘것없는 양로원에서는 오히려 젭에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하에서 소음뿐인 지상을 향해 존재를 폭로한다. 이는 지하에서 지상 위에 있는 젭에게 아무도 아니라고 말한 소녀를 연상케 한다.

이제 영화의 커다란 메시지는 더 노골적인 이미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젭이 찾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삶의 순간들 속에서 시끄러운 소음 밑에서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기린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리허설 현장은 그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준비중인 무대에 찾아간 젭은 마술사에게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마술사는 ‘이건 다 속임수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갑자기 뒤에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한 오랜 작가 친구가 찾아온다. 그는 로마에 실망했다며 유일하게 떠오른 작별인사 친구가 젭이라고 말하며 인사를 하고 떠난다.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앞을 돌아본 젭은 사라진 기린을 보며 놀란다. 기린은 젭이 찾아 헤메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린이 사라지는 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 오직 순간에서만 드러난 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라지게 하는 행위가 속임수라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것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는 젭의 발화는 허상, 허위로 가득 찬 일상에 대한 염증으로부터의 탈피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술사의 거절은 그 탈피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제 파티장에서도 젭은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젭의 집은 밤에는 사교장, 파티장으로 존재하는 비장소가 되지만, 아침에는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늙은 노인의 일상적 공간이 되어버린다. 가사 도우미는 오직 아침에서만 등장하지만, 영화의 후반 부분의 파티장에서 젭은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눈다. 파티장에서 가사 도우미와 대화하는 모습은 밤의 유흥, 향락, 쾌락으로부터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가사 도우미에게 실존적 고민을 털어놓지만 대화가 되질 않는다. 여기에서 그의 고독이 드러난다.

영화는 성인의 경지에 오른 마리아 성녀가 젭의 집에 방문하면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리아 성녀는 반송장처럼 늙은 할머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교계 사람들이 자리를 마련해 그녀를 영접한다. 무대에 왕처럼 마리아 수녀가 앉혀 있고, 하나씩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매우 엄숙하지만 오직 마리아 수녀만이 소녀처럼 발을 앞뒤로 흔들 뿐이다. 종교계 사람들 중에는 보톡스를 맞은 수녀, 속세의 여흥을 즐기는 추기경도 있다. 그 공간은 엄숙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직 성녀 마리아만 그 공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다리만 흔들다. 흔들다 떨어진 슬리퍼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장면은 일종의 코미디가 된다.

성녀는 스스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오직 대변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몇몇 사람이 그것에 불만을 보이자 스스로 입을 연 성녀 마리아는 ‘난 가난의 서약을 한 몸이라 가난에 대해 얘기할 수 없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죠.’라고 고백한다. 즉 성녀는 언어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성녀 마리아는 젭의 집,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는다. 마침 지나가는 홍학들이 젭의 테라스에 있는 그녀 주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 광경을 본 젭이 조용히 성녀 쪽으로 간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수녀의 질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말하자, 성녀 마리아는 자신이 식물의 뿌리만 먹는 이유가,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바람을 불자 홍학들이 모두 날아간다. 잠깐 쉬었다 날아가는 홍학들은 순간에만 머무는 궁극의 아름다움이자 새벽의 꿈과 같은 찰나이다. 성녀 마리아의 말은, 결국 껍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식물의 뿌리는 지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고, 유려하거나 세련되지도 않으며 아주 잠깐 동안 등장하다가 떠난다. 영화는 그렇게 궁극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 젭은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감성감정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3. 나오기.

과거의 흔적, 성스러움, 세속성을 지니고 있는 로마에서 젭은 끊임없이 걸었다. 걸으며 영화의 메시지가 녹아있는 다양한 파편들을 마주한다. 스트립걸의 쇼윈도, 수도원, 지하와 지상이 나뉜 건축물, 젭의 집, 중년 스트립걸, 보톡스 시술 샬롱, 파티장의 예술공연, 장례식 예복 피팅룸, 장례식장, 양로원, 마술 리허설 무대, 성녀 영접실, 홍학들이 내려앉은 테라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인생 사진전, 지명수배자의 집,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전시된 은밀한 공간, 과거 등대 앞 첫사랑과의 만남까지, 모든 파편들은 공간, 행위, 시선에 의해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 의미를 관통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궁극적 아름다움의 정체이다. 그리고 말미에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지 않되, 그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며 끝낸다. 영화는 유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온전히 드러내지 않거나, 보잘 것 없는 이미지가 주는 정서를 업고 나타나거나, 조명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잠깐동안 드러났다 사라지는 등의 연출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코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언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비언어적 행위나 연출 등으로 언어화된 것들을 무력케 한다. 그 아름다움을 눈치채든 눈치채지 않든, 아름다움은 어김없이 존재하며 영화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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