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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게임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굉장히 가학적인 영화이다. 2007년에 shot by shot 리메이크로 새로운 퍼니 게임을 내놓았다. (즉 언어, 배우, 장소만 다를 뿐, 나머지는 완전히 오리지널과 똑 같은 작품을 말한다. 하네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보여지지 못해서 영어권 사람들을 겨냥해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소비하는 미디어를 조롱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며, 극작술의 규칙과 제 4의 벽을 허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은 클리셰들이 비틀어지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영화가 어떻게 무엇을 비틀고 허무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러한 행동으로 어떻게 의도가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독창성과 성취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극작술의 규칙

극작술이란 극작품을 만드는 수법이다. 많은 영화들이 대체로 선택하는 보편적인 형식을 극작술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클리셰로 바꿔 읽는다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도발이다. 전형성에 대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도발이다.

초반 시퀀스에서 드라마틱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고속도로 씬은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관객은 자동차에서 게오르그 가족이 클래식 시디를 듣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안심하게 된다. 이내 들리는 평온한 클래식 음악과 장난을 치는 가족의 모습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다 갑자기 샤우팅과 스크리밍이 가득한 하드코어한 락 음악이 나온다. 잡음, 괴성과 함께 연출되는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은 굉장한 위화감을 보여준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물과 아이는 헤쳐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네케는그 규칙을 비웃으며, 반려동물인 개를 죽이고 게오르그 부부의 아들을 죽인다. 그들을 죽이는 방식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개의 울음소리로 살해장면을 상상케 하거나, 게오르그 가족이 피터와 몸싸움을 하는 소리와 총성이 울리는 소리로 아들의 살해장면을 상상케 한다.

또 영화 초반 보트 시퀀스에서 아들이 두고 간 칼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인 냥 암시를 하지만, 마지막에 폴과 피터가 안나를 보트에 태울 때, 안나가 주운 칼은 아주 손쉽게 피터에게 뺏기게 된다.

심지어 남편 게오르그는 폴이 휘두르는 골프채 한 방에 걷질 못하게 된다. 기존 영화에서 주인공은 제아무리 부딪히고 맞아도 잘 움직이지만, 하네케는 이러한 영화적 허용을 무시해버린다. 심지어 폴과 피터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 안나가 총으로 피터를 죽이지만 폴이 리모컨으로 직접 영화를 되감기를 해서 총을 빼앗아 못죽이게 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감독은 영화적 허용 대신, 영화의 주인공들인 폴과 피터에게 영화를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4의 벽

영화를 장악한 폴과 피터, 아니 폴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윙크하고 말을 걸며, 영화 자체의 전개마저 바꾸어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독이 제 4의 벽을 허무는 것을 알 수 있다.

4의 벽은 연극용어이다. 본래 연극 공연 중에는 관객이 무대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더라도 관객과 무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관객의 존재를 모른다. 관객들은 이 가상의 제 4의 벽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제 4의 벽이 허물어질 때,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작품 밖의 세상을 모른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사라지게 된다.

피터는 관객을 쳐다보며 어때요? 그들이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던지, 폴과 피터의 놀이에 체념한 게오르그가 그들의 게임에 반응하지 않자, ‘그거 비겁한데? 상영시간은 채워야지.’라는 말을 하며 관객을 쳐다본다. 영화에서 폴은 관객을 인식하며 영화 속 픽션에 동화되지 않고자 하는 인물이다. 게오르그 가족의 옷을 보자. 그들은 꽃무니 원피스, 줄무니 티셔츠, 색이 있는 셔츠를 입고 있지만, 폴과 피터는 오직 흰색의 옷만을 입고 있다. 영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자, 하네케의 의도를 위해 설계된 하네케의 말이다.) 그들은 마치 관객을 위한 것처럼 가학행위를 계속한다. 심지어 피터가 죽을 때에는 영화 자체를 되감는다. 왜냐하면 악당을 무찌르는 전개는 이 영화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은 영화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질서가 관객을 더 절망스럽게 만들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보트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제법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선 가상과 현실이 똑같은 현실이잖아.’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관객을 우롱한다. 그동안 관객에게 윙크를 하고 관객을 위해서 가학행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들은 당신과 우리는 같아.’라는 듯한 메세지를 남긴다. 결국 영화는 관객을 가학적 관음을 즐기는, 폭력 동조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관음증

영화가 시종일관 선사하는 불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소비하려 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드코어 락은 끊임없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속도로 장면, 관객을 쳐다보는 폴의 장면은 끊임없이 우리가 영화를 관찰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이른바 소급효과라 불리는데, 이는 연극에 몰입되지 않아야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거리를 두어 영화가 고발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일컫는다. 영화에서 관객을 향해 고발하는 것은 영화 속 폭력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이자 영화 속 가학에 함께한 방관자로서의 관객이다.

 


'저장'을 하고 '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게이머의 전능함을 비웃는 게임, 언더테일



여기 비슷한 모습의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이다. 언더테일의 시놉시스는, 몬스터가 살고 있는 지하세계에 떨어진 어느 소녀가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모험을 떠나면서 몬스터와 싸울 수도 있고, 몬스터를 살려줄 수 있는데, 몬스터를 죽이면 나중에 특정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주인공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비웃는다. 살려주더라도 주인공의 위선을 고발한다. 심지어 게임을 끄고 몬스터를 죽이기 이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캐릭터는 주인공의 전능함을 비꼰다. 이렇듯 언더테일은 끊임없이 게이머가 주인공에 이입해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이 게임에서 몬스터를 죽일 때, 게이머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미디어 관음증은 소비자가 자신을 미디어를 소비하는 전능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폭력, 가학을 대리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게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퍼니 게임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관음증적 가학성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폴이 말한다.

벌써 끝내려고? 납득할 만한 전개를 하고 제대로 끝내야지, 게임은 계속된다. 일방적으로 그만 둘 수 없어.'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자기가 만든 세계에 주인공을 가두려는 내레이터와 싸우는 게임, 스탠리 패러블



여기 스탠리 패러블이라는 게임이 있다. 그는 회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지시가 나오는대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일을 하는 스탠리가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를 돌아다니게 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이다. 모든 배경과 이야기는 내레이션에 의해 설명된다. 심지어 그는 스탠리의 행동마저 장악하려 한다. 가령, 왼 쪽 문과 오른 쪽 문이 있는 방에서, 내레이션은 스탠리는 왼 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게이머가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내레이션은 들어간 이유를 정당화 하려 한다. 혹은 스탠리를 설득하려 한다. 결국 이 게임에서 내레이션을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끄는 것이다.

게임은 제작자의 정해진 구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 퍼니 게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감독이 설치한 덫에 걸려 빠져나가려 하지만, 탈출구는 영화에 없다. 관객은 사이코가 되어 영화를 즐기거나, 영화를 꺼버리거나 극장을 나가야 한다.

단지 그것만이 답일까?

미카엘 하네케는 우리에게 망치질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폭력에 둔감해지는 우리에게 경종을 올린 것이다. 그것을 본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고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퍼니게임을 즐기지 않게 되고 그러한 영화를 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카엘 하네케가 진정으로 바라는 진짜 결말이 아닐까?



소통하는 영화의 진화

문학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영화가 발전하던 시기에서 몽타주 기법을 극찬했다.

몽타주 기법이란 롱테이크와 상반되는 영화적 기법으로, 컷들을 나누어서 연결하는 기법을 말한다.

가령 무표정의 사람을 담은 컷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식탁에 음식이 놓여있는 컷을 보여준다면, 관객은 해당 컷의 사람이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듯 몽타주 기법은 장면을 쪼개서 그 간극을 관객의 상상으로 메우도록 한다.

벤야민은 그림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몰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화를 낯설게 볼 수 있고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몽타주에 익숙해지고,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폭력, 선입견 등으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두기가 힘들다. 이에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망치질을 시도한다. 가령 퀴어 인권 운동을 다루는 '런던 프라이드'라는 영화는 전형적인 서사구조에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캐릭터를 넣음으로써 관객에게 '게이, 레즈비언을 비롯한 퀴어도 이성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겟아웃'은 '차별'이라는 소재와 '공포'라는 소재를 결합해서, 흑인이 느끼는 차별에 대한 불안을 관객이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관객이 인종차별을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퍼니게임은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비틀어버림으로써 관객을 도발하고 조롱한다. 기존의 제 4의 벽을 허물고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지워낸다. 그리고 영화의 폭력성을 현실에 접속시킨다. 극장을 나온 관객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단순히 오락거리로 소비되었던 영화가 울타리에서 탈출한 것이다. 봉준호의 어떤 영화에서 송강호는 관객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영화는 관객에게 외친다. 당신들에게 전달해야 할 진실이 있다고..

제 4의 벽을 허무는 방식 자체는 항상 영화에 거리를 두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몽타주에 익숙해졌듯이 제4의 벽을 허무는 영화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가령 '데드풀'은 제 4의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참신한 오락을 선사해준다. 또 퍼니게임이 개봉하기 이전부터 제 4의 벽을 허무는 기법은 존재해왔고 오락적으로 소비되어왔다. 중요한 건, 감독이 언제 어떤 재료로 메세지와 어떻게 결합하느냐일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없애고 거기에 폭력을 접속시킨 방식. 그것이 퍼니게임만의 독창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퍼니게임을 굳이 리메이크 한 이유도, 이 영화의 효과가 특히 극장에서 유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거나 형식들을 결합함으로써 영화는 끊임없이 실험한다. 항상 어떤 영화는 울타리에서 나와 관객에게 진실을 외치려고 진화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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