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평가받는 바이오쇼크1을 내놓았던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바이오쇼크1이 해저도시를 그렸다면,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공중도시를 그린다.

배경은 1900년대 즈음으로, 미국 우월주의, 신권정치와 자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겉보기에) 유토피아적 세계인 컬럼비아이다.


바이오쇼크1의 해저도시 모습 


인피니트의 공중도시는 시리즈 1의 음침해 보이는 도시에 비해 굉장히 낭만적이고 화사하다.


도시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게임을 하면서 정말 많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또 단순히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고, 공중도시의 사회상을 미학적으로 잘 드러낸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종교적인 메시지들, 엄숙하고 웅장한 예술상과, 지도자를 효과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들.

그만큼 매 공간들이 섬세하고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다.

플레이하게 되면 아름다운 것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보여주는 장관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주로 대립하는 키워드는 인종과 자본주의이다.

유색인종은 죄인으로 취급받고 착취당하며, 심각한 불평등에 의해 노동자들은 삶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분노한 유색인종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권력자에 맞선다.



그러나 이 게임의 주인공인 부커 드윗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저 빚을 탕감하려면 여자를 데려와라.’라는 의뢰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누빌 뿐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되는 이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는 꽤나 충격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자면, 게임은 단순히 미국 우월주의, 자본주의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세계에 양자역학을 뒤섞는다.

그럼으로써 조금은 복잡하지만 지적 쾌감을 선사해주면서도, 하나의 독창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체험 시켜준다.

 


바이오쇼크 1의 형태를 따라가지만, 전투나 이동의 자유도는 줄어들고 직선적인 플레이가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또 활기있는 캐릭터를 지닌 엘리자베스와의 협력으로 적어도 외롭지 않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해석 (스포일러가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는 부커 드윗의 내면 세계이다. 부커는 콤스톡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해설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공중 도시는 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 이후로 세례를 받은 부커 드윗(콤스톡)이 세운 도시이다. (운디드 니란 백인 개척자들에 의해 벌어진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건을 말한다.)

결국 그는 미국 식민지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세례를 통해, 부커 드윗은 가해자로서의 드윗(콤스톡)과 피해자로서의 드윗(탐정사무소 드윗)으로 분열된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드윗이라고 묘사했다고 그의 가해자성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려 하는 건, 그를 오염시킨 사회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속죄의 의지가 있는 드윗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지나치게 평행우주를 넘나든 콤스톡은 생식능력을 잃고 부커 드윗의 딸을 훔쳐 간다.

경제난에 굴복한 부커 드윗은 뒤늦게 후회하고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여기에서 콤스톡에게 살해당한 루커스 남매는 콤스톡을 없애기 위해 부커 드윗을 콤스톡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루커스 남매는 공중도시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다. 그들의 과학적 동조가 자신의 신격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콤스톡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이후 양자단위로 쪼개져 평행우주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혼란스러운 드윗은 기존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공중도시의 존재와 거기에 가야 하는 자신의 이유를 수립한다.

결국 그가 찾는 건 그의 딸이였고, 그가 없애고자 하는 건 가해자로서의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진정한 속죄가 아니다. 다시 기억을 되찾은 그가 깨달은 건 콤스톡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콤스톡의 가능성, 즉 시대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하는 건 피해자로 대표되는 엘리자베스에 의한 죽음이다.


콤스톡이 그의 딸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딸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가부장적 존재이다.

오히려 딸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개조하려 하고 훈육하려 한다.

게임에서 보여주는 콤스톡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애나는 콤스톡의 손에 들어갈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탈당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굉장히 염세적으로 게임은 끝나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탐정사무소에서 드윗이 애나를 찾는 숨겨진 장면이 나온다.

(게이머의 상상에 엔딩을 맡기겠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보인다.)

필자의 입장에서 부커 드윗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속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그의 철학, 삶의 양식을 벗어 던지는 행동,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익사할 때, 무수한 평행세계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진다.

콤스톡의 가능성이 지워지자 콤스톡 세계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엘리자베스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딸 애나를 키우고 있는 가난한 탐정 부커 드윗으로 돌아가게 된다.

위대한 개척자 가부장적인 백인 미국인을 지워내고,

부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드윗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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