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지인이 '목소리의 형태' 2인 무료 예매권을 선물해주셔서, 친구와 함께 아트나인에 가게 되었다~~

아트나인은 주류 영화관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영화들을 상영해주는 다양성 영화관이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광고도 없고, 오히려 영화와 책과 음악들을 소개해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조명이 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맘 편히 앉아서 영화가 준 여운을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영화관 앞에 있는 개방형 카페도 훌륭하다. 날씨도 좋아서, 바람 맞으면서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화덕 피자를 구워준다는데, 시간이 없어서 주문하지는 못했다. 다음엔 꼭 화덕피자를 먹어봐야지.


(자비에 돌란의 '탐 엣더 팜' 포스터는 아직도 걸려있네..)







브런치에서 완성본 읽기

https://brunch.co.kr/@baejjangmovie/26





*이 글은, 1년 전 미학 수업에서 제출했던 과제를 다시 다듬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논문, ‘모바일 미디어와 공간적 실천 -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 중심으로 –, 문안나를 참고하여 썼습니다보톡스 샬롱 씬’, ‘젭의 집에 대한 분석, 그리고 젭의 걷기.’ 행위 아이디어는 위 논문에서 가져왔습니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 - The Beatitudes



1. 들어가기.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2014년에 개봉한 영화로, 201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영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세련된 음악과 함께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수려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간단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의 주인공 젭은 인기 작가이자 유명인사이다. 물론 젊었을 때 소설 한 권을 쓴 이후로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그는 상류 사회에서 유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상류 사회에서도 최고가 되길 원하며, 최고가 되어서도 파티장을 무력하게 할 정도의 아우라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점점 그는 자신의 삶과 주변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떠나고, 아무도 그를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한다. 그러던 중, 성녀를 초청한 파티장에서 성녀를 만나게 되고, 성녀는 젭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암시해 준다. 마지막에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 감성, 감정, 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 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영화는 다양한 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어, 욕망, 과시와 같은 허상으로 존재하는 껍데기들, 예술이라는 형식을 지닌 작품들, 성스러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그것들을 일종의 재료로 활용하여 감독은 차근차근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하여 전달한다.

영화는 주인공인 젭이 걷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걸으며 다양한 일상들을 감상한다. 장면 장면마다 젭은 ‘감상자’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영화에서 우리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 시선에는 상류 사회의 삶에 대한 염증, 혹은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묻어있다.

 




2. 장면 분석하기.

영화는 로마의 아름다운 건축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으나, 그 곳의 주민들은 조각상 옆에서 책을 읽거나 물로 손을 씻으며 주체적으로 공간과 관계한다. 그 뒤에 일본인 관광객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로마의 건축물은 관람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을 찍는 일본인 한 명이 쓰러진다. 그들의 관광이 일시정지되며 사람들이 몰려든다. 관광객의 졸도로 관람의 대상으로만 남았던 그 공간은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비명소리와 함께 장면은 파티장으로 옮겨진다. 파티장 연출에서도 흥미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파티장의 스트립걸은 쇼윈도 안에서 음란한 복장으로 관능적인 춤을 춘다. 유흥에 빠져버린 파티 참가자들에게 스트립걸은 그저 관음증적 대상일 뿐이다. 스트립걸의 파티 참가자들에게 소유된 쇼윈도라는 공간에서 구체적 관계는 단절되었다. 오직 특정 목적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쇼윈도를 바라보는 파티장에 머물지 않고 쇼윈도 안으로 들어간다. 파티장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사라지고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스트립걸이 몸짓하는 소리만 들린다. 이 순간 쇼윈도는 관음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스트립걸의 구체적 일상에 침투한 것이다. 이 때 쇼윈도는 관계가 단절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 된다. 물론 거시적으로 스트립걸의 삶은 관중의 욕망에 의해 구속되어 있겠지만 그럼에도 스트립걸의 구체적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중년 스트립걸과 관련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산책을 하는 젭은 매우 독특한 건축물에 도착한다. 그는 아이를 찾는 엄마를 지나쳐 돔형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출물 한가운데에 있는 바닥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은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젭은 그 사이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젭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젭을 비춘다. 아래에서 아이가 누구냐고 묻는다. 젭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참, 아무도 아니지.’라고 말한다. 당황한 젭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 길을 걷는다. 젭은 지상에 있고, 아이는 지하에 있다. 철조망은 무언가를 가두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아이를 가두고 있는 건지 젭을 가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지하의 아이의 목소리는 지상을 걷는 유명인사를 무력케 한다. 젭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무수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어떤 아이에 의해 무력화된 것이다. 카메라는 결코 지하의 아이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온갖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길들여지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녀는 결코 젭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언어적 발화행위는 언어로 점철되어있는 잡담 속 젭을 뒤흔든다.

이제 젭은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스트립걸을 만나게 된다. 스트립걸을 만나기 전에 카메라는 두 명의 여성들을 통해 현대의 슬픈 여성상을 보여준다. 리무진 안의 슬픈 창녀, 히잡을 쓴 슬픈 여성, 이들은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에 의해 대상화되고 소유되는 ‘여성’으로 드러난다. 다시 카메라는 친한 친구를 만나 룸으로 들어가는 젭을 따라간다. 그는 친한 친구의 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50대 중년 스트립걸로, 지적인 스트립걸을 꿈꾸고 있다. 스트립걸 활동으로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나중에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진다. 그녀는 전형적인 형태의 가정을 꾸리는 걸 거부한다. 애초에 결혼에 대한 욕심이 없다. 스트립걸로서 그녀의 몸을 영화는 매우 관능적이게 보여주지만, 대화 속 그녀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만큼 대상화되지 않는다. 멀리서 그녀는 대상화되는 창녀이지만, 그녀의 구체적인 삶은 대상화되지 못하며, 오히려 욕망을 취하는 관중들보다도 주체적이다.

젭은 보톡스 시술을 하는 샬롱에 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오직 시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 시술사가 주도하는 대화조차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한 도구적 발화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샬롱은 젊음에 대한 욕망이라는 목적에 의해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 때 다한증이 심한 수녀가 그곳을 찾아온다. 수녀의 등장은 젭의 이목을 끈다. 수녀에게 기도해달라 말하는 시술사의 모습은 위화감이 든다. 수녀라는 성스러움은 자본주의의 옷을 입은 인간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 것이다.

감정 역시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젭은 중년 스트립걸을 파티장에 초대한다. 파티장에서는 여러 예술공연들이 진행중이다. 그리고 어떤 소녀가 벽에서 페인트칠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다. 공연을 하기로 한 소녀가 친구들과 놀고있는 걸 본 어른들은 친구들을 내쫓으며 소녀를 재촉한다. 수의사가 꿈인 소녀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지만 결국 어른들에게 이끌려 무대로 향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어린 예술 소녀의 행위는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온갖 페인트들을 진흙처럼 뭉개고 절규하며 달려드는 소녀의 몸짓은 그녀를 이용하려는 어른들에 저항한다. 그렇게 흰 벽은 온통 진흙 색 페인트들로 뭉게진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결과물은 다르게 나타난다. 갑자기 벽은 소녀가 칠해놓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된 것이다. 구체적 경과를 떠나서 이러한 장면배치는 방금까지의 서럽고 슬픈 소녀의 저항을 무색케 한다.

젭이 감상하는 성스러움, 감정, 즉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욕망의 식민지에 굴복한다. 그러나 젭 본인은 오히려 그러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적 질환을 가졌던 어느 청년의 죽음으로 장례식이 열린다. 젭은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중년 스트립걸에게 알려준다. 젭은 왕처럼 어느 넓은 의자에 앉아 중년 스트립걸의 장례식 예복을 점검해준다. 중년 스트립걸은 넓은 무대 위 조명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평가받으며, 한구석에 자리잡은 진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이 이미지는 격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례식장에 가기 위한 옷을 갈아입는 공간임에도, 집 한 채가 될만한 규모의 공간에서 한 명의 여인이 옷을 고르며 젭에게 평가받는다. 젭은 평가자로서 그녀를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장례식에서의 격식을 알려준다. 그 공간에서 감정이 오가는 장소로서의 장례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오직 장례식이라는 커다란 사교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위해 존재하는 비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 장례식장에서 젭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는 격식을 차리며 행동하려 하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죽은 청년의 친구가 관을 들기로 하지만, 애초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청년의 관을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다. 결국 젭과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관을 드는데, 몇 걸음 걷다가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장례식 예복을 갈아입었던 공간에서 그는, ‘장례식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유가족의 슬픔을 빼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실례’라고 말했었다. 젭의 격식은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젭이 오직 상류사회만을 걷는 건 아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공간을 걷는 행위도 영화에서 나타난다. 가령 그는 양로원 같은 공간에 들른다. 그곳에는 노인들이 모여 한가로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 공간은 주체들의 구체적인 행위로 일상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갑자기 한 노인이 젭을 향해 묻는다. ‘누가 당신을 돌봐주죠?’ 그 말에 젭은 생각에 빠진다. 그가 꿈꿔왔고 즐겨왔던 일상이 허상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몸담은 상류사회에서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성찰이 없는 여흥만 존재하지만, 보잘것없는 양로원에서는 오히려 젭에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하에서 소음뿐인 지상을 향해 존재를 폭로한다. 이는 지하에서 지상 위에 있는 젭에게 아무도 아니라고 말한 소녀를 연상케 한다.

이제 영화의 커다란 메시지는 더 노골적인 이미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젭이 찾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삶의 순간들 속에서 시끄러운 소음 밑에서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기린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리허설 현장은 그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준비중인 무대에 찾아간 젭은 마술사에게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마술사는 ‘이건 다 속임수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갑자기 뒤에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한 오랜 작가 친구가 찾아온다. 그는 로마에 실망했다며 유일하게 떠오른 작별인사 친구가 젭이라고 말하며 인사를 하고 떠난다.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앞을 돌아본 젭은 사라진 기린을 보며 놀란다. 기린은 젭이 찾아 헤메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린이 사라지는 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 오직 순간에서만 드러난 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라지게 하는 행위가 속임수라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것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자기를 사라지게 해달라는 젭의 발화는 허상, 허위로 가득 찬 일상에 대한 염증으로부터의 탈피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술사의 거절은 그 탈피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제 파티장에서도 젭은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젭의 집은 밤에는 사교장, 파티장으로 존재하는 비장소가 되지만, 아침에는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늙은 노인의 일상적 공간이 되어버린다. 가사 도우미는 오직 아침에서만 등장하지만, 영화의 후반 부분의 파티장에서 젭은 가사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눈다. 파티장에서 가사 도우미와 대화하는 모습은 밤의 유흥, 향락, 쾌락으로부터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가사 도우미에게 실존적 고민을 털어놓지만 대화가 되질 않는다. 여기에서 그의 고독이 드러난다.

영화는 성인의 경지에 오른 마리아 성녀가 젭의 집에 방문하면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리아 성녀는 반송장처럼 늙은 할머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교계 사람들이 자리를 마련해 그녀를 영접한다. 무대에 왕처럼 마리아 수녀가 앉혀 있고, 하나씩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매우 엄숙하지만 오직 마리아 수녀만이 소녀처럼 발을 앞뒤로 흔들 뿐이다. 종교계 사람들 중에는 보톡스를 맞은 수녀, 속세의 여흥을 즐기는 추기경도 있다. 그 공간은 엄숙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직 성녀 마리아만 그 공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다리만 흔들다. 흔들다 떨어진 슬리퍼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장면은 일종의 코미디가 된다.

성녀는 스스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오직 대변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몇몇 사람이 그것에 불만을 보이자 스스로 입을 연 성녀 마리아는 ‘난 가난의 서약을 한 몸이라 가난에 대해 얘기할 수 없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죠.’라고 고백한다. 즉 성녀는 언어화될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성녀 마리아는 젭의 집,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는다. 마침 지나가는 홍학들이 젭의 테라스에 있는 그녀 주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 광경을 본 젭이 조용히 성녀 쪽으로 간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수녀의 질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말하자, 성녀 마리아는 자신이 식물의 뿌리만 먹는 이유가,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바람을 불자 홍학들이 모두 날아간다. 잠깐 쉬었다 날아가는 홍학들은 순간에만 머무는 궁극의 아름다움이자 새벽의 꿈과 같은 찰나이다. 성녀 마리아의 말은, 결국 껍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식물의 뿌리는 지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고, 유려하거나 세련되지도 않으며 아주 잠깐 동안 등장하다가 떠난다. 영화는 그렇게 궁극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 젭은 깨닫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침묵감성감정공포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저 너머의 것이며끔찍한 인간성의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이다그리하여 그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기로 결심하며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한다.


 



3. 나오기.

과거의 흔적, 성스러움, 세속성을 지니고 있는 로마에서 젭은 끊임없이 걸었다. 걸으며 영화의 메시지가 녹아있는 다양한 파편들을 마주한다. 스트립걸의 쇼윈도, 수도원, 지하와 지상이 나뉜 건축물, 젭의 집, 중년 스트립걸, 보톡스 시술 샬롱, 파티장의 예술공연, 장례식 예복 피팅룸, 장례식장, 양로원, 마술 리허설 무대, 성녀 영접실, 홍학들이 내려앉은 테라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인생 사진전, 지명수배자의 집,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전시된 은밀한 공간, 과거 등대 앞 첫사랑과의 만남까지, 모든 파편들은 공간, 행위, 시선에 의해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 의미를 관통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궁극적 아름다움의 정체이다. 그리고 말미에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지 않되, 그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며 끝낸다. 영화는 유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온전히 드러내지 않거나, 보잘 것 없는 이미지가 주는 정서를 업고 나타나거나, 조명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잠깐동안 드러났다 사라지는 등의 연출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코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언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비언어적 행위나 연출 등으로 언어화된 것들을 무력케 한다. 그 아름다움을 눈치채든 눈치채지 않든, 아름다움은 어김없이 존재하며 영화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굉장한 영화라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겟아웃을 보게 되었다.

 

우선 예고편을 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예고편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ㅜㅜ

 

이 영화는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스릴러 공포 영화이다.

깜짝 놀래키는 공포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래키지 않고도 사람들을 소름끼치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독창적이다그러나 나는 공포를 만드는 방식보다 공포를 만들어내는 이유에서 더 소름을 느꼈다. 자세한 이유는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굳이 서술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서 불안, 소름, 당혹감 등등을 느꼈던 것 같다. 영화 막바지에서는 힘이 풀렸다. ‘, 이제 다 끝났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서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흑인들이 차별받고 혐오당하는 방식들을 고스란히 공포, 스릴러라는 장르에 (세련되게) 녹여낸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서러운 감정마저도 느껴지게 만든다.

비슷한 영화를 꼽으라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꼽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닮은 구석이 꽤 있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꼭 보시길 바란다. 물론 예고편은 보지 말기를..



평론 보러가기 http://baejjangmovie.tistory.com/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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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대학교 미학 수업 때 다뤘던 책을 뒤늦게 샀었다.

'영화를 어떻게 미학적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서 사게 된 첫 번째 미학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지, 예술만이 갖는 독창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번역문이라 그런지 문장은 드럽게 어렵지만,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지하철에서 시간 때우며 읽기 딱 좋다. 물론 가끔 머리가 번아웃 되서 문장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 책을 친구한테 보여주니까, 친구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추천해줬다.

미학 오디세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모른다.

다만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미학 소개서 중 유명한 책으로 알려져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마침 신촌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는데, 1, 2, 3권 다 한 권씩 있었다!


2권은 개정판이 아니어서 그냥 걸렀다. 개정판을 싸게 구하기 위해 종종 중고서점에 들러봐야겠다.

혹시 삶에 피로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열심히 공부하거나, 열심히 일을 하는데, 자꾸만 소모되어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피로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그러한 피로를 느낀 적이 많았다.

진부한 격언을 빌리자면 우리 모두가 특별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정말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우리의 고유한 무언가가 억눌리는 듯한 느낌도 든다.

우린 지금 억눌린 보통의 존재인 것일까?

 


여기 두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하나는 무언가에 억눌려 지쳐버린 우리가 잊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알려주는 영화이다.

-다른 하나는 특별함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다.

 





어린왕자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는 기존의 동화 어린왕자를 현대 자본주의(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 세계 위에서 재해석한 영화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각자의 창의성을 존중 받지 못하고, 주어진 과제와 경로에 따라 자기계발을 하게 된다. 수능을 위해 정답을 외워야 하고, 취업을 위해 좋은 대학교, 좋은 학과, 좋은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의 아이디어보다도 회사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갖추는 것을 중요시 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색깔을 망각하고 가장 보통의 사람이 되어갈 수밖에 없을까? 이 영화는 보통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켜주는 영화이다.

 





프랭크

프랭크는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프랭크에 관한 영화이다우리는 예술가를 꿈꾸는 변방의 키보디스트 존이 되어, 프랭크의 밴드와 함께 자신의 예술적 영혼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나를 추구할 수 있을까?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함은 먼 나라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특별해질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답한다.

당신이 존과 같다면, 부정할 수 없는 이 대답에 함께 할 것이다. , 혹시 당신이 프랭크 같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길 바란다.





이 영화는 명작 동화 어린 왕자를 새롭게 해석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ost로는 한스 짐머가 참여했다. 미국버전은 물론이고 프랑스버전에서도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다확실한 건, 노래가 무척 좋다는 것이다. 미국 버전도 좋고, 프랑스 버전은 왠지 샹송같다. 한국 버전은 ‘turn around’라는 제목으로 효린이 불렀다. (겨울 왕국도 그렇고, 왠지 효린은 애니메이션 ost 현지화 담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비행기를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비행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뱀한테 물려 지구를 떠난 어린왕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영화는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배경이 되는 도시는, 마치 입시 강국 한국을 연상케 한다. 빈틈없이 효율적인 구성을 한 도시 풍경, 숨이 막힐 것만 같은 효율적인 인생 스케줄. 심지어 가로수마저 모두 직사각형이다. 도시는 무척이나 '자본주의'스러운 도시이다.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스럽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어린 왕자어린이 대 어른’이라는 구도를 그대로 현대 자본주의에 대입한다. 여러분들이 대한민국 입시를 맛보았다면, 이 영화의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입시의 추억만 상기시켜주지는 않는다.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동화 어린 왕자를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간 중간에 들려주는 동화 어린 왕자이야기는 우리를 어린 왕자에 대한 추억으로 여행 시켜준다.





많은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이 영화도 멋진 상상력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 시킨다. 소행성의 사람들의 운명, 어린 왕자의 운명, 그리고 비행사의 운명을 현대 자본주의의 판 위에서 새롭게 직조한다어른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라며, 효율적인 스케줄에 맞춰 자기 계발을 해야만 하는 주인공은 이러한 판 위에서 늙어버린 비행사를 만나 새로운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러나 어린이라면 알고 있을 소중한 가치를 상기시켜주는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삶에 지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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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영화 평론에 관심이 막막 생겨서, 평론가들을 찾아보다가 시네필로 불리는 정성일 평론가를 알게 되었다.

위키를 보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2010년,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광 3단계' 격언을 실천이라도 하듯, 영화감독으로서 첫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영화광 3단계 격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필자는 2 단계까지 도달했다. 3단계는.. 죽기 전에는 꼭..ㅜ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격언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심지어 정성일씨는 트뤼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 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 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사람도 어마어마한 시네필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프랑스 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이더라..

당시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롯한 여러 영화 거장들이 누벨 바그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누벨 바그는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한, 전통이나 관념주의에 저항하는 사조라고 한다.

그러니깐 기존의 잘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영화들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시도들을 하는 사조인 셈이다.

이렇게 반항적이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책을 사게 되었다. '머리 아프게 할 책도 아니니깐 집에서 시간날 때 읽어야지.' 생각을 하며 주문을 했다.


근데 책이 엄청 두껍다. 거의 800페이지 정도 된다.

트뤼포에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꽉꽉 담겨진 느낌이다.

심지어 초반엔 트뤼포의 어머니의 삶과 아버지의 삶도 어느정도 망라해서 보여준다. 재미없어서 그 부분은 대충 건너뛰었다.

언제 다 읽을 수 있을런지.. 하하ㅜ

브런치에서 증보판 읽으러 가기 : https://brunch.co.kr/@beajjangmovie/9









1. 들어가기.

 자비의 돌란의 5번째 작품 '마미'는 전에도 다뤘던엄마를 주제로 한다. 그는 이미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그린, ‘나는 엄마를 죽였다.’를 찍은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엄마를 죽였다.’에서 아들은 엄마를 거부하지만, ‘마미에서는 아들이 지나치게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미에서 인상깊은 것들 중 하나는 역시 화면비이다. 1 1 화면비 덕분에 영화에서는 풍경보다 인물이 더욱 중심적으로 드러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자비에 돌란의 스타일과 어울리는 화면비이다. 또한 답답해보이는 느낌을 주어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비의 형식이 영화 전체와 조응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화면비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이미지들은 충분히 영화의 색깔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화면비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건 자비에 돌란이 보여주는 새로운 영화적 체험이다.

 이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필자는 관계 너머 사회적 맥락에 더 집중해 보았다. 중간에 화면비를 열어젖히며 자유를 외치는 스티브, 나중에 구속복을 입다가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스티브를 보며 이 영화가 억압과 해방을 다룬다는 걸 느꼈다. 또한 스티브가 보여주는 성적인 행동과 이기심을 보며 이 영화가남성성여성을 다루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2. 장면 훑어보기.

 첫 장면에서 빨랫줄에 걸린 남성용 팬티가 나온다. 그 아래에서 팬티를 향해 디안이 손을 뻗는다. 다음 장면에서 그 손은 사과를 수확한다. 이는 아들(남성 팬티)을 향해 엄마(디안)가 추구하는 어떠한 수확(사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과나무를 살피는 디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수확할 사과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탐색하는 디안의 표정에 불안함이 느껴진다.

 이 불안함은 초반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디안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 소년원에서 사인을 할 때 열쇠다발이 불안정하게 달그락거리는 장면. 카일라와 인사하는 디안이 더럽혀진 창문 속에서 겨우 얼굴만 보여지는 장면. 마치 디안의 불안하고 절망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디안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해자를 향해너는 죽었다.’ 등의 언행을 보이며, 불운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원에서 나온 스티브는 디안과 동행한다. 디안은 스티브가 흡연을 못하게 막지만, 마지막 한모금을 스티브에게 나누어 준다. 이는 아들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스티브는 디안과 스티브를 쳐다보는 남자 청소년을 견제하며 디안의 팔을 감싼다. 이는 디안에 대한 스티브의 애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애착은 디안이라는주체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엄마라는 대상에 대한 애착으로 보여진다. 택시기사와 싸우는 장면에서 택시기사의창년이라는 발언에 발끈한 스티브는 차에 올라가서 침을 뱉는다. 그러나 그것을 말리는 디안에게까지 거친 언행과 행동을 하는 걸 볼 때 그의 분노가 엄마라는 대상을 위한 분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티브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 자기 방에 들어가서 빨간 커튼을 친다. 다음날에 빨간 커튼은 디안에 의해 수거된다. 빨강은 정열, 충동을 상징한다. 즉 스티브의 쉽게 흥분하는 특징과 활달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티브의 방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면, 그가 다양한 색깔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스티브는 현실과 관계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갇혀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안은 커튼을 걷는다. 스티브가 다양한 색깔과 관계하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디안이 찾는 수확(사과)일 것이다.

카일라의 일상도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일을 쉬고 있지만,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과도 제대로 관계하지 못한다. 가족 앞에서 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더듬을 뿐이다. 디안과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딸이엄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남편이카일라라고 부르자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역할이 아닌 오직 그녀의 이름에 반응하는 모습은, 카일라가 주어진 역할(엄마, 교사)에 피로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교사로 일했지만,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하고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피로가 느껴진다. 그녀도 스티브처럼 현실세계의 색깔과 관계 맺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엔을 만나면서 입이 트이기 시작한다. 물론 스티브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디엔의 부탁으로 일일가정교사로 스티브의 공부를 봐주려고 하지만, 스티브는 오히려 말 더듬는 카일라를 가르치려 하고 괴롭힌다. 이 관계는 카일라의 분노로 전복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스티브가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택시기사와 다투는 장면에서 그는 조금도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카일라의 분노에 공포를 느끼는 건 왜일까? 필자의 생각엔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에게 분노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디안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티브는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카일라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형편과 디엔의 상황을 생각해서 자신의 공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스티브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디엔과 카일라를 사랑하는 스티브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스티브는 그들과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디안을 위해 도둑질을 해서 물건들을 가져오지만 디안이 자신의 마음을 봐주질 않는다는 이유로 흥분하고 디안에게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의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디안의 목을 조르게 된다. 이렇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디안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게 된다.

또 그의 사랑하는 방식엔 관능이 빠지지 않는다. 해고당해 눈물을 흘리는 디안의 입을 틀어막고 틀어막은 손등에 키스를 하는 장면은,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인과의 사랑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카일라를 초대했을 때에도, 카일라와 디안에게 관능적인 몸짓을 보인다. 디안에게 관능적 스킨십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도 한다. 엄마와의 관계에서조차 그에겐 관능이라는 금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중에 디안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는 스티브가 디안에게 키스한다.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디안을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자유롭지만 폭력성과 부족한 고민으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영화에서 그의 자유를 막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이다. 중간에 피해보상금을 요구하는 청구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그러나 그 자유로부터 비롯된 불가항력의 장애물이다. S14 법안을 수용한 디안의 선택도 스티브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물이다. 사회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자유를 통제한다. 통제는 지나친 자유를 바로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청구서를 받은 디안은 폴의 법률적 도움을 받기 위해 몸을 치장하고 데이트를 한다. 폴이 디안과의 데이트를 즐기는 반면에, 디안은 어떻게든 폴과 소송 관련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의 행동들은 어쩔 수 없이 폴을 위해야 하면서도 어떻게든 폴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디안은 전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섹슈얼리티를 다른 남성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셈이다.

 수용소에 끌려가는 모습도 꽤나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스티브는 자신을 잡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선다. 그러나 그들은 스티브를 제압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전기 충격을 감행한다. 이에 디안은 스티브를 잡아가는 사람들을 욕한다. 디안은 통제하는 사람들이 스티브를 주체로 대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스티브는 구속복을 입게 되고 주체적으로 맺는 관계는 사라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브는 침묵을 하고 있고, 오직 그를 다루는 사람들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디안이 s14 법안을 선택할 정도로 스티브에게 바라는 건 그녀의 환상을 통해 드러난다. 스티브가 꿈을 이루고 짝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수확(사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스티브를 통제하는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통제를 스티브의 탈출하는 몸부림을 통해 부정한다. 스티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무엇일까?

 




3. 영화 분석하기.

 영화에서 디안, 스티브, 카일라가 모일 때, 그들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자유는 트라우마로 형성된 것들로부터, 장애라고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과 질서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엔, 카일라, 스티브는 각자 부족한 인물로 취급되지만 서로의 관계를 통해 자유를 보장받는다. 디안은 카일라와 의 도움으로 스티브에 대한 돌봄에 대한 수고를 덜게 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노동에 더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는 디안과 카일라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카일라는엄마로서가 아닌카일라로서 존재하게 되며, 말더듬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자유엔 한계가 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다시 억압으로 돌아간다. 스티브는 현실세계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스티브를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색깔을 지우려 하는 현실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스티브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을 훼손한다.

 스티브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특히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 할 때 그는 분노한다. 또 그는 여성을 관능의 대상으로 대한다. 카일라에게 추파를 던지거나자기야.’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 디안에게 유혹하는 몸짓을 하거나, 디안에게 키스하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도한다. Adhd 증후군이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스티브를 비정상적 아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렇게 낙인찍지 못 할 수도 있다.

우선 영화에서는 스티브, 디안, 카일라를 제외한 다른 사회적 관계들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거의 미시적인 세 사람들의 관계만을 보여줄 뿐이며, 그들이 왜 현재 이런 모습인지에 대해서조차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카일라가 어떤 사건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라는 상상을 할 뿐이며, 스티브가 어떻게 adhd 진단을 받고 어떻게 악화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그저 디안의 몇마디를 통해 가늠할 뿐이다.

그러나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들은 있다. 스티브의 행동들은 통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성성의 모습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모습,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을 때 보이는 분노, 자기 중심성,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남성성을 구성한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스티브의 행동을 사회적 맥락과 연결지으려는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디안이 치마를 입을 때, 스티브가 셀린 디온의 노래를 틀고 화장을 한 모습으로 춤을 출 때, 가라오케에서 놀림을 받을 때이다.

 디안은 보통 청바지를 입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디안은 네 번 치마를 입는다. 먼저 번역 일을 구하러 갈 때 그녀는 치마를 입는다. 여기에서 치마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서의 격식이 된다. 그리고 남성 상사가 있는 사무실에 갈 때 그녀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간다. 그러나 상사 대신 그의 아내가 그녀를 맞이한다. 그녀는 디안을 이쁜이라고 부르는 등, 디안을 상사에게 꼬리치는 여성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디안을 해고한다. 여기에서 디안은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여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안은 이쁜이라는 말을 사양한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이는 폴과의 데이트에서도 드러난다. 폴을 유혹하기 위해 열심히 치장하는 디안의 모습은, 원치 않는 가부장적 현실과의 불가피한 타협인 것이다. 오직 카일라가 집에 놀러올 때 시스룩과 치마를 입은 디안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멋을 내기 위해 그러한 옷을 입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간에 셀린 디온의 노래를 틀며 치장을 한 스티브는 꽤나퀴어스럽게 보인다. 매니큐어나 화장을 한 스티브는 통상적인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가라오케에서 그가 디안을 향해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에게 호모라는 놀림을 받는다. 이를 통해 필자는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이 스티브에게 향한다고 보았고, 스티브의 남성성이 어쩌면 현실사회에서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본래의 스티브의 정체성을 짓누른 결과물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사회는 스티브의 극단적인 모습을 통제하려 한다. 사회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본다.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회 내부의 염증은 남겨둔 채로 말이다.

 물론 이 영화가 그러한 부분들을 집중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필자는 그저 이 영화에서 나아가 왜 스티브가 그러한 행동을 하고, 왜 통제당하며, 그럼에도 자유를 향해 외치고 뛰어가는지에 대해 오늘날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추측해 본 것이다. 마지막에 스티브가 구속복에서 벗어나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벅차오르는 느낌을 준다. 스티브가 벗어나려는 통제는 사회적 산물이다. 스티브는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그러나 사회는 자신의 색깔을 포기하지 않는 스티브를 규정하고 변이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산물로부터 벗어나는 스티브조차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스티브도, 디안도 아닌 마미이다. 디안은엄마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더 정확히는 남편을 잃고 경제부양과 돌봄노동을 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스티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 물론 그녀는 스티브를 사랑한다. 그녀는 스티브가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엄마이다.

카일라는 오히려엄마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듯하다. 그녀는 딸아이의엄마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족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카일라와 스티브를 만나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소수자로 낙인 찍히는 그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존재감이 지워졌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안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카일라로서의 존재감을 완성시킨다. 다시는 교사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녀는 결국 기쁘게 스티브를 가르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영화는 두 엄마와 한 아들의 영화인 셈이다. 여기에서 아들은 타협하기 힘든 자기만의 색깔이 있지만, 사회에 의해 변이된 남성으로서의 아들이다. 한 엄마는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존중하고자 하지만 여러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나중엔 (현실을 거부하면서도 현실의 산물이 되어버린) 아들조차 버거워하는, 그러나 눈물을 씹어 삼키며 꿋꿋이 희망을 갖고 이겨내고자 하는 엄마이다. 다른 한 엄마는, 가족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감을, 전형적이지 않은 모자를 통해 다시 회복해가는, ‘엄마가 아닌카일라로서 살아나는 엄마이다. 이들 모두 사회로부터 비정상, 비주류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지만, 사회가 지워지고 그들만의 소우주가 형성될 때 그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4. 나오기.

 돌란은 이 영화를 통해 사회 속에서 낙인 찍히고 변이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내외로 얻게 되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본인의 통찰, 대안을 정리해서 제시하기보다는 성소수자로서의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끄집어낸 여러 감정, 느낌, 생각들을 풀어낸 멋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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