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인터스텔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시리즈 중,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특히 메인 빌런은 앞으로도 이만한 존재감의 빌런이 나오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히스 레저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위해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우들이 자신의 각본을 벗어나는 애드립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히스 레저 만큼은 그가 작중 캐릭터에 몰입해서 나타나는 애드립을 영화에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조커의 작중행동이 보여주는 치밀함과 괴기스러움 역시 조커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데 한 몫 한다.

명작으로 평가받는 '양들의 침묵'의 천재적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느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는 '정의'를 주제로 하여, 세 명의 캐릭터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다크 나이트로서의 배트맨, 화이트 나이트로서의 하비 덴트,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있는 조커이다.


조커의 광기와 배트맨의 고뇌, 그리고 하비 덴트의 심리 변화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배트맨과 조커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고,

배트맨과 하비 덴트 사이에도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주며 캐릭터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그린다.





영화가 또 여러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문제의 여지가 있는 딜레마부터 당장 사람의 목숨이 달린 딜레마까지 다양하다.

딜레마를 통해 관객은 '악은 무엇이고, 우리는 이 악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등의 어려운 고민들을 하게 된다.

특히 한스 짐머의 음악이 한 몫 한다.

음악은 관객의 심리를 더욱 고조시킨다.

영화관에서 보면, 영화에 완전히 동화되는 체험을 할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굉장하다.

시나리오, 캐릭터, 음악, 주제 등등..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특히 영화의 리얼리즘은 다시 한번 영화를 보게 만든다.


영화에서 보았던 다양한 폭발신과 액션신은 CG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가령 병원 폭발신에서는 실제 병원 세트장을 지었고, 사정상 창문이 깨지는 CG만 썼다고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오락거리는 다른 영화에 비해 화려하거나 새롭지는 않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미장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떤 캐릭터, 상징의 이미지, 어떤 느낌, 어떤 고민을 관객에게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의 영화가 감상보다도 체험을 시켜주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새 영화가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는 것일 테다.

그의 영화는 영화관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다크나이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드는 체험의 영화들 중 하나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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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들의 민족 대명절이 있다. 바로 퀴어 퍼레이드다.


퀴어 퍼레이드가 매력적인 것은, 기독교 단체의 혐오 시위에 둘러싸인 와중에도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유쾌하고 즐겁게 페스티벌을 즐길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혹여나 동성애자를 비롯한 퀴어가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뒤로가기를 누르시길..)


다양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부스를 체험할 수 있고, 일정 금액의 후원금을 지불하면 그들이 만든 물건들을 얻을 수 있다.

다양한 퀴어 예술인들이 모여 공연을 하기도 하고, 서울 도심을 돌아다니는 퍼레이드를 하기도 한다.




가는 길에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외치는 기독교인 단체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페스티벌을 제대로 방해하려고 벼르고 있었는지, 여러 북들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페스티벌 입구이다.

아쉬운 건, 페스티벌 내부에는 press 증을 얻지 않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해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걸 제외하고는 별로 찍지를 못했다.



부스를 몇 개 돌지도 않았는데, 에코백에 꽂히고 말았다.

에코백에 적힌 pride라는 단어는, 차별과 폭력에 대항하는 긍정적인 단어로

퀴어들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옛날에 백팩을 멜 때엔, 자꾸 뱃지가 뜯어져서 뱃지를 달지 않았었는데,

이번 에코백을 계기로 뱃지를 달기 시작했다.

무지개 테마의 두 뱃지는 각각 국제 엠네스티 단체와 녹색당 단체에서 받은 뱃지이다.

녹색당의 뻔뻔한 '뭐' 문구가 인상적이다.

옆에는, 기억은 안나지만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관련해서 같이 행동하다가 받은 뱃지로 기억하고 있다.

노란 리본, 보라색 리본, 무지개 리본이 손을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필자가 속한 알바노조 부스이다.

일터에서의 자유로운 젠더 권리를 보장하라고 써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cgv에서는 여성 노동자는 치마를 입고, 남성 노동자는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이러한 규정이 성별이분법을 강요하는 것이고, 그러한 이분법을 강요말라는 메세지를 담은 스티커를 나눠주기도 했다.

무지개 초커 목걸이도 팔았는데 디자인이 꽤 귀여웠다.



이번 퀴어 페스티벌을 돌면서 받은 굿즈들이다.


흥미로운 건, 퀴어 기독교 단체와 불교 단체도 있었다는 것이다.

흥 많은 스님은 북을 두들기고 음악에 맞춰서 사람들하고 춤을 추기도 하셨다.

기독교 단체에서는 예수 복장을 한 서양인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필자는 성소수자 관점에서 성경을 다루는 책을 구매했다.

아무래도 가족이 기독교인이라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각종 대사관에서도 부스를 차렸다.

독일, EU, 프랑스 등등에서 왔었다.

구글에서도 굿즈를 팔고 있었는데,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 OS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가 반가웠다.

(혹시 안드로이드도 퀴어가 아닐까? ㅋㅋㅋ)


또 무성애자 단체에서도 부스를 차렸는데,

연애감정을 세분화해서 설문조사를 하는 걸 보았다.

기존의 연애관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진행하고 있는 모난돌 프로젝트에서 엽서를 팔길래 구매해버렸다.

모난돌 프로젝트는 '정상적인 삶'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창작하는 프로젝트이다.

모난돌 동화도 연재하고 있다. 모난돌의 모험을 다루는 이야기 책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필자를 가장 설레게 만든 것은, 바로 영화제 부스였다.


이번에 퀴어 영화제가 신사역 부근에서 열린다고 한다.

배제받았던 다양성을 담아낸 다양성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꼭 영화제에 갔다와서 후기 글을 써야겠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온갖 혐오가 들끓는 와중에도 유쾌한 페스티벌을 준비한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비가 많이 내리긴 했지만, 어떤 날씨도 페스티벌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년에 참여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년 페스티벌도 왕왕 기대해야겠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유명한 영화관, 스타리움에 가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으로 왕년에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던 그 영화관이었다.



영등포 cgv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었다. 이런저런 볼거리가 많은 공간이다.



cgv는 4층에 있었고, 상영관은 7층에 있었다.

많은 층을 점유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 공간을 넓게 쓰지 못한것일 수도 있겠지만..



스타리움 상영관 입구다. 입구부터 느낌이 남달랐다.

'특별관'의 포스를 막 풍긴달까?



굉장히 컸다.

스크린도 스크린이지만 공간 자체도 굉장히 넓었다.

필자는  g열 가운데 쪽에 앉았는데, 영상을 보면서 자막을 읽기 위해 눈알을 굴려야만 했다.

개인적으로는 g열이 눈에 가득차는 느낌을 주어서 좋았던 것 같다.

더 편하게 보려면 최소 h열 이상 뒤로 가야 할 것 같다.


공간이 넓어서 사운드가 퍼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시끄럽게 낼 줄 알았다.

넓은 공간임에도 뭉개지지 않고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감상한 영화는 다크나이트였다.

어렸을 적에 디비디를 빌려서 조그마한 모니터로 봤던 게 천추의 한이었는데,

이제서야 그 한을 풀 수 있었다.

심지어 4k 화질이었다!


우선 스타리움에서 영화를 선명하게 즐기려면 최소 4k 이상의 화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스크린이 커서 화질이 낮으면 흐릿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다크나이트 4k의 화질도, 일반 영화를 보는 정도의 선명도를 주었던 것 같다.

스타리움이 아닌 일반관에서 봤다면 극강의 화질을 체험했었을 것이다.



8층 가는 길에는 sphere x관이 있다. 옆에는 가상현실을 다루는 vr park가 있는데, 나중에 꼭 가볼 생각이다.



스타리움은 굉장히 멋진 경험이었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최고의 경험이 될 것 같다.


눈이 가득차는 경험을 느끼고 싶다면, f열이나 g열에 가서 보시라!

힘들게 보고 싶지 않다면 h열 혹은 그 뒤의 좌석을 노려보시라!



유럽을 대변하는 세계적인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불편한 영화들 중 하나인, 퍼니게임이다.

2007년에 개봉한 똑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다.

사실 배우, 언어, 장소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1997년 작을 추천한다.



2007년 리메이크된 퍼니게임의 포스터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어느 조용한 호숫가 별장으로 휴양을 온 가족은 두 청년을 만나게 된다.

두 청년은 그들이 다음날 골프 시합을 하기로 한 다른 가족의 사촌이었다.

요리를 준비하는 아내에게 한 청년이 계란을 구하기 위해 별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 청년의 행동은 어딘가 수상하다.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영화는 굉장히 잘 만들었다.

관객을 주무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이 영화는 참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절망감을 선사해준다.

관객이 절박해 하든, 안심하든, 통쾌함을 느끼든,

감독은 관객의 멱살을 잡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간다.





굳이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호불호가 갈릴만한 영화이다.

보더라도, 심리 상태가 나쁘지 않을 때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평론 보러가기 http://baejjangmovie.tistory.com/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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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 증보판 보기 : https://brunch.co.kr/@beajjangmovie/10





퍼니게임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굉장히 가학적인 영화이다. 2007년에 shot by shot 리메이크로 새로운 퍼니 게임을 내놓았다. (즉 언어, 배우, 장소만 다를 뿐, 나머지는 완전히 오리지널과 똑 같은 작품을 말한다. 하네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보여지지 못해서 영어권 사람들을 겨냥해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소비하는 미디어를 조롱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며, 극작술의 규칙과 제 4의 벽을 허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은 클리셰들이 비틀어지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영화가 어떻게 무엇을 비틀고 허무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러한 행동으로 어떻게 의도가 전달되는지,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독창성과 성취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극작술의 규칙

극작술이란 극작품을 만드는 수법이다. 많은 영화들이 대체로 선택하는 보편적인 형식을 극작술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클리셰로 바꿔 읽는다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도발이다. 전형성에 대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도발이다.

초반 시퀀스에서 드라마틱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고속도로 씬은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관객은 자동차에서 게오르그 가족이 클래식 시디를 듣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안심하게 된다. 이내 들리는 평온한 클래식 음악과 장난을 치는 가족의 모습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다 갑자기 샤우팅과 스크리밍이 가득한 하드코어한 락 음악이 나온다. 잡음, 괴성과 함께 연출되는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은 굉장한 위화감을 보여준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물과 아이는 헤쳐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네케는그 규칙을 비웃으며, 반려동물인 개를 죽이고 게오르그 부부의 아들을 죽인다. 그들을 죽이는 방식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개의 울음소리로 살해장면을 상상케 하거나, 게오르그 가족이 피터와 몸싸움을 하는 소리와 총성이 울리는 소리로 아들의 살해장면을 상상케 한다.

또 영화 초반 보트 시퀀스에서 아들이 두고 간 칼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인 냥 암시를 하지만, 마지막에 폴과 피터가 안나를 보트에 태울 때, 안나가 주운 칼은 아주 손쉽게 피터에게 뺏기게 된다.

심지어 남편 게오르그는 폴이 휘두르는 골프채 한 방에 걷질 못하게 된다. 기존 영화에서 주인공은 제아무리 부딪히고 맞아도 잘 움직이지만, 하네케는 이러한 영화적 허용을 무시해버린다. 심지어 폴과 피터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 안나가 총으로 피터를 죽이지만 폴이 리모컨으로 직접 영화를 되감기를 해서 총을 빼앗아 못죽이게 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감독은 영화적 허용 대신, 영화의 주인공들인 폴과 피터에게 영화를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4의 벽

영화를 장악한 폴과 피터, 아니 폴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윙크하고 말을 걸며, 영화 자체의 전개마저 바꾸어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독이 제 4의 벽을 허무는 것을 알 수 있다.

4의 벽은 연극용어이다. 본래 연극 공연 중에는 관객이 무대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더라도 관객과 무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관객의 존재를 모른다. 관객들은 이 가상의 제 4의 벽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제 4의 벽이 허물어질 때,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작품 밖의 세상을 모른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사라지게 된다.

피터는 관객을 쳐다보며 어때요? 그들이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던지, 폴과 피터의 놀이에 체념한 게오르그가 그들의 게임에 반응하지 않자, ‘그거 비겁한데? 상영시간은 채워야지.’라는 말을 하며 관객을 쳐다본다. 영화에서 폴은 관객을 인식하며 영화 속 픽션에 동화되지 않고자 하는 인물이다. 게오르그 가족의 옷을 보자. 그들은 꽃무니 원피스, 줄무니 티셔츠, 색이 있는 셔츠를 입고 있지만, 폴과 피터는 오직 흰색의 옷만을 입고 있다. 영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자, 하네케의 의도를 위해 설계된 하네케의 말이다.) 그들은 마치 관객을 위한 것처럼 가학행위를 계속한다. 심지어 피터가 죽을 때에는 영화 자체를 되감는다. 왜냐하면 악당을 무찌르는 전개는 이 영화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은 영화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질서가 관객을 더 절망스럽게 만들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보트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제법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선 가상과 현실이 똑같은 현실이잖아.’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관객을 우롱한다. 그동안 관객에게 윙크를 하고 관객을 위해서 가학행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들은 당신과 우리는 같아.’라는 듯한 메세지를 남긴다. 결국 영화는 관객을 가학적 관음을 즐기는, 폭력 동조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관음증

영화가 시종일관 선사하는 불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소비하려 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드코어 락은 끊임없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속도로 장면, 관객을 쳐다보는 폴의 장면은 끊임없이 우리가 영화를 관찰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이른바 소급효과라 불리는데, 이는 연극에 몰입되지 않아야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거리를 두어 영화가 고발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일컫는다. 영화에서 관객을 향해 고발하는 것은 영화 속 폭력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이자 영화 속 가학에 함께한 방관자로서의 관객이다.

 


'저장'을 하고 '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게이머의 전능함을 비웃는 게임, 언더테일



여기 비슷한 모습의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이다. 언더테일의 시놉시스는, 몬스터가 살고 있는 지하세계에 떨어진 어느 소녀가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모험을 떠나면서 몬스터와 싸울 수도 있고, 몬스터를 살려줄 수 있는데, 몬스터를 죽이면 나중에 특정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주인공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비웃는다. 살려주더라도 주인공의 위선을 고발한다. 심지어 게임을 끄고 몬스터를 죽이기 이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캐릭터는 주인공의 전능함을 비꼰다. 이렇듯 언더테일은 끊임없이 게이머가 주인공에 이입해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이 게임에서 몬스터를 죽일 때, 게이머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미디어 관음증은 소비자가 자신을 미디어를 소비하는 전능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폭력, 가학을 대리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게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퍼니 게임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관음증적 가학성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폴이 말한다.

벌써 끝내려고? 납득할 만한 전개를 하고 제대로 끝내야지, 게임은 계속된다. 일방적으로 그만 둘 수 없어.'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자기가 만든 세계에 주인공을 가두려는 내레이터와 싸우는 게임, 스탠리 패러블



여기 스탠리 패러블이라는 게임이 있다. 그는 회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지시가 나오는대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일을 하는 스탠리가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를 돌아다니게 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이다. 모든 배경과 이야기는 내레이션에 의해 설명된다. 심지어 그는 스탠리의 행동마저 장악하려 한다. 가령, 왼 쪽 문과 오른 쪽 문이 있는 방에서, 내레이션은 스탠리는 왼 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게이머가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내레이션은 들어간 이유를 정당화 하려 한다. 혹은 스탠리를 설득하려 한다. 결국 이 게임에서 내레이션을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끄는 것이다.

게임은 제작자의 정해진 구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 퍼니 게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감독이 설치한 덫에 걸려 빠져나가려 하지만, 탈출구는 영화에 없다. 관객은 사이코가 되어 영화를 즐기거나, 영화를 꺼버리거나 극장을 나가야 한다.

단지 그것만이 답일까?

미카엘 하네케는 우리에게 망치질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폭력에 둔감해지는 우리에게 경종을 올린 것이다. 그것을 본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고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퍼니게임을 즐기지 않게 되고 그러한 영화를 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카엘 하네케가 진정으로 바라는 진짜 결말이 아닐까?



소통하는 영화의 진화

문학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영화가 발전하던 시기에서 몽타주 기법을 극찬했다.

몽타주 기법이란 롱테이크와 상반되는 영화적 기법으로, 컷들을 나누어서 연결하는 기법을 말한다.

가령 무표정의 사람을 담은 컷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식탁에 음식이 놓여있는 컷을 보여준다면, 관객은 해당 컷의 사람이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듯 몽타주 기법은 장면을 쪼개서 그 간극을 관객의 상상으로 메우도록 한다.

벤야민은 그림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몰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화를 낯설게 볼 수 있고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몽타주에 익숙해지고,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영화를 통해 우리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폭력, 선입견 등으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두기가 힘들다. 이에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망치질을 시도한다. 가령 퀴어 인권 운동을 다루는 '런던 프라이드'라는 영화는 전형적인 서사구조에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캐릭터를 넣음으로써 관객에게 '게이, 레즈비언을 비롯한 퀴어도 이성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겟아웃'은 '차별'이라는 소재와 '공포'라는 소재를 결합해서, 흑인이 느끼는 차별에 대한 불안을 관객이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관객이 인종차별을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퍼니게임은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비틀어버림으로써 관객을 도발하고 조롱한다. 기존의 제 4의 벽을 허물고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지워낸다. 그리고 영화의 폭력성을 현실에 접속시킨다. 극장을 나온 관객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단순히 오락거리로 소비되었던 영화가 울타리에서 탈출한 것이다. 봉준호의 어떤 영화에서 송강호는 관객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영화는 관객에게 외친다. 당신들에게 전달해야 할 진실이 있다고..

제 4의 벽을 허무는 방식 자체는 항상 영화에 거리를 두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몽타주에 익숙해졌듯이 제4의 벽을 허무는 영화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가령 '데드풀'은 제 4의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참신한 오락을 선사해준다. 또 퍼니게임이 개봉하기 이전부터 제 4의 벽을 허무는 기법은 존재해왔고 오락적으로 소비되어왔다. 중요한 건, 감독이 언제 어떤 재료로 메세지와 어떻게 결합하느냐일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없애고 거기에 폭력을 접속시킨 방식. 그것이 퍼니게임만의 독창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퍼니게임을 굳이 리메이크 한 이유도, 이 영화의 효과가 특히 극장에서 유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거나 형식들을 결합함으로써 영화는 끊임없이 실험한다. 항상 어떤 영화는 울타리에서 나와 관객에게 진실을 외치려고 진화해왔다.






파이어 워치는 산불 감시원이 되어 산을 둘러다니며 일을 하는 게임이다.

어드벤처 게임이지만 비주얼 노벨의 느낌도 있다.

이 게임은 정적이고 힐링이 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오직 무전기를 통해 맞은 편 감시원과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수다를 떨면서 하이킹을 하는 게임은 아니다.

주인공은 산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모험을 하게 된다.





게임의 시작은, 주인공 헨리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몽환적인 배경과 서정적인 음악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황색 텍스트를 클릭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다.





물론 단순히 이야기만을 진행하지 않고, 이야기를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

아마 선택에 따라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헨리라는 인물에 이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게임의 그래픽은 사실적인 질감보다는 애니메이션같은 질감을 가지고 있다.

부드럽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변화하는 환경과 날씨를 보는 맛도 있다.





중간 중간에 있는 물품상자를 통해 물품과 전단지, 쪽지를 얻을 수 있고, 지도 경로도 알 수 있게 된다.




주변 환경, 사물들과 입체적으로 조응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소한 사물들을 집어서 살필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지형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낮은 바위나 발판이 있는 특정한 절벽을 오르내리거나, 지지대가 있는 절벽에서 로프를 고정시켜 오르내릴 수 있을 뿐이다.

환경, 사물과의 상호작용은 제작자가 정해준 대로 해야만 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게임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맞은 편 감시대의 주인공과 무전기를 통한 대화를 통해

산을 돌아다니며 '걷는 것', 그리고 주변 환경을 '보는 것'에 집중 시킨다.

우리는 대화를 무시할 수도 있고, 원하는 답변을 선택해서 대화에 함께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게임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소설이다.

무전기를 통한 대화가 주인공을 돌아다니게 하고, 다양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해주며, 그것을 해결하도록 해준다.

이 게임은 모험을 하며 특정한 장면을 마주하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대화로 이끌어지는 비주얼 노벨인 셈이다.





볼륨이 짧다. 금방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다.

대화를 나누며 탐험을 하는 방식이 단조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을 보며 산을 거니는 걸 좋아한다면 이 게임은 괜찮은 게임이 될 것이다.


게임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꽤나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마지막 즈음에는 엄청 몰입하면서 게임을 진행했었다.


게임 스토리도 괜찮았고, 부담없이 즐기기에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숨겨진 엔딩도 있다.





오리지널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어메이징' 시리즈로 리부트되고, 다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합류하기 위해 리부트된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을 봤던 사람들은 이전 작품과 비교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접하는 관객이라면 굉장히 재미있게 볼 것 같다.

오리지널 스파이더맨 시리즈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도 있고,

심지어 톰 홀랜드의 외모에서 토비 맥과이어가 살짝 보이기도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빌 워 이후로 어벤져스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15살 피터 파커는

아직은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의 보호(?) 아래 지루한 학교생활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악당 세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





우선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진중하지는 않다.

수다스럽고 어설프다. 게다가 그는 성장기 소년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이 '스파이더맨'이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된다.

특히 '성장기 소년'이기 때문에, 영화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함께 다루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피터 파커의 성장기를 다루면서도, 위트와 로맨스가 있는 하이틴 드라마가 공존하는 액션 영화가 된다.

'어벤져스'가 맛있는' 요리'들을 훌륭하게 엮어낸 거대한 스케일의 액션영화라면,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와 액션을 하이틴 드라마와 버무리면서도

'아이언맨'이라는 보증수표를 붙인 친근한 오락영화이다.

(대도시를 활공하는 시원시원한 장면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악당 또한 개연성 있게 그려지며 단순히 소모되지 않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스탠다드'적인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 구성이 그다지 독창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가령, 벌쳐가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동기는 공감도 됐고 설득력있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이었다.

악당으로서 그의 동기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악당으로서의 행동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했다.

또 영화는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이유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그저 '서민 영웅' 스파이더맨이 '나쁜 놈'이 된 '서민 악당' 벌쳐를 무찌르면서 '재벌 영웅' 아이언맨에게 인정받을 뿐이다.

물론 재미있게 만든 오락영화에서 굳이 신경써야 할 요소가 아닐 수 있겠지만,

새로운 세대에게 영향을 줄 마블의 서사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주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보수적 인식을 답습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양한 인종들로 캐릭터를 캐스팅 한 건 꽤 인상깊었다.





참고로 쿠키 영상이 2개나 있다.

특히 두번째 쿠키영상은 엔딩크래딧이 완전히 끝나야 나오는데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영상이니 꼭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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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물을 찍던 마블이, 그동안 나왔던 히어로들을 한 영화에 묶어서 '어벤져스'라는 영화를 냈다.

'토르'나 '퍼스트 어벤저'가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는 굉장히 잘 만든 오락영화이다.

단독출연만 했었던 각 히어로들이 전혀 따로 놀지 않고 케미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액션은 다양한 눈요기를 선사한다.

덕분에 관객은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느낌을 받게 된다.





마블 특유의 위트도 재미있고, 그들이 뭉치는 과정도 개연성있게 그려진다.

특히 마지막 뉴욕 전투씬은, 중간중간 넋을 놓고 봤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잘 만들었다.





마블이 벼르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만든 오락영화이다.

따로 놀 것만 같았던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해서

왠만한 전쟁씬 부럽지 않게 거대한 스케일의 전투씬을 위트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선사한다.

마블 팬들에게는 굉장한, 기념비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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