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를 보면서 처음에 느낀 건, 새로운 상상력을 입은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느낀 건, 염세주의를 넘어선 번아웃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필자가 느낀 염세주의는 우리의
현실이었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미약하게 이어 나가는 작은 희망을 보여주려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 옥자는 그런 영화였다.
옥자를 만든 건,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미자와 떨어뜨린 것도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강간시키고, 무대 위에 올리며, 도축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자본주의라는 언어를
지닌 미란도 기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대보험도 들지 못한 트럭 운전수는 노동자의 인권을 보지 않고
오직 노동자를 기업을 위한 기계장치로 보는 기업가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미란도 기업의 경영인은 루시와 낸시로 구성된다. 사실상 사업가 기질이
있는 낸시에 의해 경영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낸시는 오직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니고 회사를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민한 판단력으로 위기를 대처하고, 감정이
배제된 채로 ‘돈’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미자를 상대한다. 그녀에게 논리적 허점은 없다. 다만 윤리적 감수성이 빠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낸시에게 루시는 필요한 존재이다. 루시는 대중들에게 자신, 자신의 기업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녀는 이미지에
집착하며, 자신을 치장한다.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기꺼이
간판이 되어준다. 자본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계산적이고 논리적이며 윤리적 감수성이 배제되어
있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이미지는 따뜻하며 항상 대중을 속인다. 노조
없는 기업으로도 유명한 삼성, 최순실과 유착 관계에 있었던 삼성 역시 따뜻한 감성의 캠페인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루시는 낸시를 위한 마스크이다. 자본가 루시는 낸시라는
마스크를 쓰고 완전해 진다. 그들이 서로의 담배를 맞대서 불을 지피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루시의 경영권이 낸시에게로 전달되는 의미로도 보인다.)
그렇게 옥자를 이용하는 미란도의 기괴함은, 루시의 재기발랄한 이미지, 퍼포먼스와 낸시의 실험, 도축의 결합으로 탄생한다.
사회운동
ALF는 굉장히 흥미로운 단체다. 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투쟁한다. 옥자를 잡으려는 경비대와 경찰들을 우산으로 막고, 연막탄을 쏘며 쇠구슬로 넘어뜨린다. 미자에게, 경찰을 막기 위해 우산을 펼치는 ALF 대원들의 모습은 불꽃놀이처럼
그려진다. 차가운 현실 위의 미자에게 새로운 동화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명장면이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심지어 케이는 미자가 자신들의 계획이 시행되길 원치 않는다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한다. 이토록 완벽한 비폭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민낯은 이후에 드러나게 된다. 제이가 비폭력적인 투쟁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40년을 이어온 ALF의 전통 때문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옥자를 중심으로 한 계획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거짓말을
한 케이에게 제이는 전통을 깨뜨렸다는 명목으로 케이를 폭행한다. 옥자가 실험소에 들어가서 끔찍한 일들을
겪을 때, 레드는 ‘모두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일침을 놓는다. 동물 해방을 위해 힘쓰는 그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옥자는 신념의 대상이자 투쟁의 수단이었다.
서울에서 보여준 그들의 완벽한 동화는, 뉴욕에서 해체되면서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낸다. 미자를 깨문 옥자를 내리치려던 제이와, 그것을
막는 미자의 모습에서, ALF와 미자는 그렇게 구분된다.
언어
산골마을 – 미자는 옥자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옥자도 미자가 원하는 걸 안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는 존재이다. 미자가 옥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가 미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들은 주체적 관계자이다. ‘동물’이라는 범주와 ‘인간’이라는 범주로 나뉨에도 그들은 동등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도시 – 도시는 광장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도란도 기업의 친환경 프로젝트가 알려지기도 하고,
ALF에 의해 그들의 반윤리적 행태가 고발되기도 한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술, 산업의 발전을 이룬 공간인 도시에서 미자는 미란도 회사의 꽉 막힌 유리벽과 옥자를 홍보하기 위한 무대, 간판이 되기를 강요하는 자본가 어른들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비폭력적으로
투쟁하는 ALF를 마주하기도 한다.
자본가나 운동가, 그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한다. 옥자나 미자에게 그들은 외부인이며 소통하기 어려운 주체들이다. 심지어
‘어른’으로서 그들이 ‘아이’인 미자를 상대할 때 그들이 가진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옥자를 만나고 싶을 뿐인데, 어른들의 사정은 복잡하다. 서울의 트럭에서 미자와 옥자를 내버려두고 강으로 빠질 때, 남아있는 미자와 옥자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기까지 한다. 이러한
고립 속에서 미자의 모험이 지속되는 건, 옥자라는 동기 덕분이었다.
도축장 – 마지막으로 미자가 마주하는 건 돼지들이 가공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낸시를 만난다. 낸시와 상대하기 위해 미자가 배워야만
했던 언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 사회의 필수적 언어인 영어이고,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언어이다. 그 두 가지가 가능할 때, 미자는 ‘옥자’의 구매자가 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친구인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는 도시문명과 자본주의, 산업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구매자가
되어야만 했다.
희망
영화는 미란도 기업을 무찌르면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구해낸 새끼 슈퍼돼지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동안
미자가 옥자에게 감을 던져주었다면, 이제 새끼돼지는 미자에게 감을 물어다 준다. 10년 뒤 새끼 돼지는 어떤 존재가 될까? 사회에 나서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회에 나설 수 있는 미자에게 식품 산업에 저항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녀가 직접적인 저항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새로운 감수성을 부여할 것이다.
미자의 모험담도 휘발되지 않는다. 그녀가 마주한 ALF의 비폭력적 투쟁 방식은 미자의 감수성에 새로운 상상력을 넣어 주었을 것이며 훗날 그녀에게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트럭 운전사의 탈조선 선언도자본주의
한국에 대항하는 지친 청년 노동자의 저항이다. 결국 그는 ALF를 알게 되고 ALF 활동가가 되는 탈 한국인이 된다. (쿠키영상에 나온다.)
영화 곳곳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개인들과 새로운 감수성, 상상력의 개인들이 있었다. 설국열차처럼 사회를 해체하지는 않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전반적 서사는 굉장히
씁쓸하지만, 우리가 봉준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건 10년
뒤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엔딩을 만들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관객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도록..
명작으로 평가받는 바이오쇼크1을 내놓았던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바이오쇼크1이 해저도시를 그렸다면,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공중도시를 그린다.
배경은 1900년대 즈음으로, 미국
우월주의, 신권정치와 자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겉보기에) 유토피아적 세계인 컬럼비아이다.
바이오쇼크1의 해저도시 모습
인피니트의 공중도시는 시리즈 1의 음침해 보이는 도시에 비해 굉장히 낭만적이고 화사하다.
도시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게임을 하면서 정말 많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또 단순히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고, 공중도시의 사회상을 미학적으로 잘 드러낸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종교적인 메시지들, 엄숙하고 웅장한
예술상과, 지도자를 효과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들.
그만큼 매 공간들이 섬세하고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다.
플레이하게 되면 아름다운 것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보여주는 장관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주로 대립하는 키워드는 인종과 자본주의이다.
유색인종은
죄인으로 취급받고 착취당하며, 심각한 불평등에 의해 노동자들은 삶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분노한 유색인종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권력자에 맞선다.
그러나 이 게임의 주인공인 ‘부커 드윗’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저 ‘빚을 탕감하려면 여자를 데려와라.’라는 의뢰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누빌 뿐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되는 이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는 꽤나 충격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자면, 게임은 단순히 미국 우월주의, 자본주의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세계에 양자역학을 뒤섞는다.
그럼으로써
조금은 복잡하지만 지적 쾌감을 선사해주면서도, 하나의 독창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체험 시켜준다.
바이오쇼크 1의 형태를 따라가지만, 전투나 이동의 자유도는 줄어들고 직선적인 플레이가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또 활기있는 캐릭터를 지닌 엘리자베스와의 협력으로 적어도 외롭지 않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해석(스포일러가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는 부커 드윗의 내면 세계이다. 부커는 콤스톡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해설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공중 도시는 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 이후로 세례를
받은 부커 드윗(콤스톡)이 세운 도시이다. (운디드 니란 백인 개척자들에 의해 벌어진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건을
말한다.)
결국 그는 미국 식민지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세례를 통해, 부커 드윗은 가해자로서의 드윗(콤스톡)과 피해자로서의 드윗(탐정사무소 드윗)으로 분열된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드윗이라고 묘사했다고 그의 가해자성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려 하는 건, 그를
오염시킨 사회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속죄의 의지가 있는 드윗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지나치게 평행우주를 넘나든 콤스톡은 생식능력을 잃고부커 드윗의
딸을 훔쳐 간다.
경제난에 굴복한 부커 드윗은 뒤늦게 후회하고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여기에서 콤스톡에게 살해당한 루커스 남매는 콤스톡을 없애기 위해 부커 드윗을 콤스톡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루커스 남매는 공중도시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다. 그들의 과학적 동조가 자신의 신격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콤스톡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이후 양자단위로 쪼개져 평행우주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혼란스러운
드윗은 기존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공중도시의 존재와 거기에 가야 하는 자신의 이유를 수립한다.
결국 그가 찾는 건
그의 딸이였고, 그가 없애고자 하는 건 가해자로서의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진정한 속죄가 아니다. 다시 기억을 되찾은 그가 깨달은 건 ‘콤스톡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콤스톡의 가능성, 즉 시대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하는
건 ‘피해자’로 대표되는 엘리자베스에 의한 죽음이다.
콤스톡이 그의 딸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딸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가부장적 존재이다.
오히려 딸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개조하려 하고 훈육하려 한다.
게임에서 보여주는 콤스톡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애나는 콤스톡의 손에 들어갈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탈당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굉장히 염세적으로 게임은 끝나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탐정사무소에서 드윗이 애나를
찾는 숨겨진 장면이 나온다.
(게이머의 상상에 엔딩을 맡기겠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보인다.)
필자의 입장에서 부커 드윗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속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그의 철학, 삶의 양식을
벗어 던지는 행동,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익사할 때, 무수한 평행세계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진다.
콤스톡의 가능성이 지워지자 콤스톡 세계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엘리자베스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딸 애나를 키우고
있는 가난한 탐정 부커 드윗으로 돌아가게 된다.
위대한 개척자 가부장적인 백인 미국인을 지워내고,
부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드윗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