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는 북유럽 신화에 기반한 마블의 판타지 히어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이 나왔다면 반가웠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 다음으로 유명한 북유럽 신화의 천둥의 신, 토르가 나오며

개연성을 위해 우주 어느 공간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주얼은 꽤 볼만한 구석들이 있다.

하지만 비주얼로 영화의 전반을 끌고간다기 보다는,

눈요기를 할 수 있는 몇몇 씬들이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머도 괜찮았고, 갈등이 형성되는 원인들도 흥미로웠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토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사랑에 빠지는지에 대한 서사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액션씬도 시선을 휘어잡을 정도의 인상적인 모습은 없었다.

이 영화는 액션보다는 비주얼, 캐릭터, 서사(특히 토르의 성장담)에 집중한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전투적인 여성 캐릭터, 동양캐릭터 등등을 보여줌으로써

나름대로 다양성을 추구하고 기존의 보수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모양새는 보였으나

딱 거기까지일 뿐, 영화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느낌이 강하다.

킬링타임으로는 나쁘지 않은 영화이다.


아, 스탠 리 아저씨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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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본 영화다.

설국열차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크리스 에반스가 나온다.

막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다만, 악당이 그저 그랬다는 점과, 내용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다들 알겠지만 퍼스트 어벤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미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고, 선한 의지와 충만한 용기를 지녔으나,

허약한 신체를 지닌 우리의 주인공이 결국 멋진 미국 대장이 되는 이야기이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 영화에는 20세기 미국 문화 특유의 색깔이 있다.

크리스 에반스가 실험을 통해서 짱짱 세지는 모습을 보며 간접적으로 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떡밥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스타크의 아버지라든지, 테서렉트라든지..

(그런 의미에서 마블의 모든 영화를 본다는 것은, 떡밥과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싶다. 혹은 다른 캐릭터를 보기 위해서일 수도..)

확실한 건, 이 영화는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가 현대에 와서 어벤저스 팀의 멤버가 될 수 있는지 알게 해주는 영화이며,

무엇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어벤저스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의 주춧돌이 되는 영화라는 것이다.

 




참고로 퍼스트 어벤저의 히로인 페기 카터를 별도로 주인공으로 하는 미국 드라마, ‘에이전트 카터도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 내에서 사실상 히로인으로 소비되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는데,

마냥 소비되지 않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마블 하면 항상 떠오르는 이미지들 중 하나가 에이전트 카터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 마블의 아버지인 스탠 리도 까메오로 나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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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에이, 정말로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야?'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영화 초반부분에 나오는 '철저한 고증의 실화'라는 말처럼 영화에 나오는 황당한 일들이 다 실제라고 한다.

(마지막에 실제 박열과 히미코의 사진을 봤을 땐 조금 놀랐다. 저 사진의 저 포즈가 실제일 줄이야..)




 

이 영화는 일본에서 가장 말 안듣는 항일운동 조선인, 박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박열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사랑 이야기이도 하다.

또 영화가 끌고 가는 힘은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신권정치에 대항하는 존엄한 민중의 정신이다.

영화를 단순히 한국인 대 일본인이 아닌, 권력자 대 민중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배경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영화는 박열 뿐만 아니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그와 동등한 주체로 그린다.

가네코 후미코를 박열 못지 않게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기도 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저항 정신이다.

영화를 끌고가는 힘은 웃음과 슬픔이다.

개인적으로는 웃음과 슬픔으로 영화를 구성한 것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건들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일제강점기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재연에 충실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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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 증보판 <옥자> 평론 읽으러 가기

https://brunch.co.kr/@beajjangmovie/2






옥자를 보면서 처음에 느낀 건, 새로운 상상력을 입은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느낀 건, 염세주의를 넘어선 번아웃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필자가 느낀 염세주의는 우리의 현실이었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미약하게 이어 나가는 작은 희망을 보여주려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 옥자는 그런 영화였다.


필자는 옥자를, ‘자본주의라는 키워드와, ‘사회운동’이라는 키워드, ‘언어라는 키워드, ‘희망이라는 키워드로 독해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옥자를 만든 건,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미자와 떨어뜨린 것도 미란도 기업이다. 옥자를 강간시키고, 무대 위에 올리며, 도축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자본주의라는 언어를 지닌 미란도 기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대보험도 들지 못한 트럭 운전수는 노동자의 인권을 보지 않고 오직 노동자를 기업을 위한 기계장치로 보는 기업가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미란도 기업의 경영인은 루시와 낸시로 구성된다. 사실상 사업가 기질이 있는 낸시에 의해 경영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낸시는 오직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니고 회사를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민한 판단력으로 위기를 대처하고, 감정이 배제된 채로 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미자를 상대한다. 그녀에게 논리적 허점은 없다. 다만 윤리적 감수성이 빠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낸시에게 루시는 필요한 존재이다. 루시는 대중들에게 자신, 자신의 기업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녀는 이미지에 집착하며, 자신을 치장한다.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기꺼이 간판이 되어준다. 자본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계산적이고 논리적이며 윤리적 감수성이 배제되어 있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이미지는 따뜻하며 항상 대중을 속인다. 노조 없는 기업으로도 유명한 삼성, 최순실과 유착 관계에 있었던 삼성 역시 따뜻한 감성의 캠페인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루시는 낸시를 위한 마스크이다. 자본가 루시는 낸시라는 마스크를 쓰고 완전해 진다. 그들이 서로의 담배를 맞대서 불을 지피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루시의 경영권이 낸시에게로 전달되는 의미로도 보인다.)

그렇게 옥자를 이용하는 미란도의 기괴함은, 루시의 재기발랄한 이미지, 퍼포먼스와 낸시의 실험, 도축의 결합으로 탄생한다.

 




사회운동

ALF는 굉장히 흥미로운 단체다. 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투쟁한다. 옥자를 잡으려는 경비대와 경찰들을 우산으로 막고, 연막탄을 쏘며 쇠구슬로 넘어뜨린다. 미자에게, 경찰을 막기 위해 우산을 펼치는 ALF 대원들의 모습은 불꽃놀이처럼 그려진다. 차가운 현실 위의 미자에게 새로운 동화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명장면이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심지어 케이는 미자가 자신들의 계획이 시행되길 원치 않는다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한다. 이토록 완벽한 비폭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민낯은 이후에 드러나게 된다. 제이가 비폭력적인 투쟁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40년을 이어온 ALF의 전통 때문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옥자를 중심으로 한 계획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거짓말을 한 케이에게 제이는 전통을 깨뜨렸다는 명목으로 케이를 폭행한다. 옥자가 실험소에 들어가서 끔찍한 일들을 겪을 때, 레드는 모두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일침을 놓는다. 동물 해방을 위해 힘쓰는 그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옥자는 신념의 대상이자 투쟁의 수단이었다.

서울에서 보여준 그들의 완벽한 동화는, 뉴욕에서 해체되면서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낸다. 미자를 깨문 옥자를 내리치려던 제이와, 그것을 막는 미자의 모습에서, ALF와 미자는 그렇게 구분된다.

 




언어

산골마을 미자는 옥자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옥자도 미자가 원하는 걸 안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는 존재이다. 미자가 옥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가 미자에게 귓속말을 한다그들은 주체적 관계자이다. ‘동물이라는 범주와 인간이라는 범주로 나뉨에도 그들은 동등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도시 도시는 광장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도란도 기업의 친환경 프로젝트가 알려지기도 하고, ALF에 의해 그들의 반윤리적 행태가 고발되기도 한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술, 산업의 발전을 이룬 공간인 도시에서 미자는 미란도 회사의 꽉 막힌 유리벽과 옥자를 홍보하기 위한 무대, 간판이 되기를 강요하는 자본가 어른들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비폭력적으로 투쟁하는 ALF를 마주하기도 한다.

자본가나 운동가, 그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한다. 옥자나 미자에게 그들은 외부인이며 소통하기 어려운 주체들이다. 심지어 어른으로서 그들이 아이인 미자를 상대할 때 그들이 가진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옥자를 만나고 싶을 뿐인데, 어른들의 사정은 복잡하다. 서울의 트럭에서 미자와 옥자를 내버려두고 강으로 빠질 때, 남아있는 미자와 옥자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기까지 한다. 이러한 고립 속에서 미자의 모험이 지속되는 건, 옥자라는 동기 덕분이었다.

도축장 마지막으로 미자가 마주하는 건 돼지들이 가공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낸시를 만난다. 낸시와 상대하기 위해 미자가 배워야만 했던 언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 사회의 필수적 언어인 영어이고,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언어이다. 그 두 가지가 가능할 때, 미자는 옥자의 구매자가 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친구인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는 도시문명과 자본주의, 산업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구매자가 되어야만 했다.

 




희망

영화는 미란도 기업을 무찌르면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구해낸 새끼 슈퍼돼지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동안 미자가 옥자에게 감을 던져주었다면, 이제 새끼돼지는 미자에게 감을 물어다 준다. 10년 뒤 새끼 돼지는 어떤 존재가 될까? 사회에 나서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회에 나설 수 있는 미자에게 식품 산업에 저항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녀가 직접적인 저항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새로운 감수성을 부여할 것이다.

미자의 모험담도 휘발되지 않는다. 그녀가 마주한 ALF의 비폭력적 투쟁 방식은 미자의 감수성에 새로운 상상력을 넣어 주었을 것이며 훗날 그녀에게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트럭 운전사의 탈조선 선언도 자본주의 한국에 대항하는 지친 청년 노동자의 저항이다. 결국 그는 ALF를 알게 되고 ALF 활동가가 되는 탈 한국인이 된다. (쿠키영상에 나온다.)

영화 곳곳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개인들과 새로운 감수성, 상상력의 개인들이 있었다. 설국열차처럼 사회를 해체하지는 않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반적 서사는 굉장히 씁쓸하지만, 우리가 봉준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건 10년 뒤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엔딩을 만들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관객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도록..




영화 '옥자'를 보기 위해 친구와 고려대를 가게 되었다.



옛날 서양식의 건물들 뒤로 유일하게 현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 건물 안에, 작은 영화관이 있다.



상영관은 하나만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면서 쉴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고, 각종 팜플렛도 비치되어 있었다.



상영관은 꽤 괜찮았다.

손잡이 뚜껑을 열면 책을 올릴 수 있는 테이블이 나온다는 게 독특하긴 했다.

화질은 4k 화질이었고, 음질도 아쉬울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광고 없는 정시 상영은 필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

덤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조명이 켜지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옥자에 대한 여운은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ㅜ)

필자는 엔딩크레딧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 나와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쿠키영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 후회했다고 한다..)


워낙 멀어서 다시 갈 것 같지는 않지만,

'옥자' 덕분에 새로운 영화관을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좋게 생각하고 싶다.


친구한테 이런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로를 가게 되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대학로에 있다고 하는데, 처음엔 쉽게 찾지 못했다.



어느 건물 안에, 디비디 방을 지나 한 층 올라가면, 숨겨진 공간이 나오게 된다.



소박하지만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강연도 꽤나 인상깊었지만, 무엇보다도 필자를 설레게 한 건 새로 나온 책에 대한 광고였다.



옆에 있는 책은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산 책이다.

필자가 흥분한 책은 왼쪽에 있는 '여성괴물'이라는 책이었다.

1993년에 바바라 크리드라는 대중문화 페미니스트가 쓴 책인데, 최근에 개정판 번역서로 국내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공포영화에서 여성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보여주는 귀신들린 여성, 기괴한 자궁, 마녀 등등의 '여성 괴물'에 대한 일관적인 관점을 제시한다고 한다.

에일리언, 엑소시스트, 캐리, 사이코 등등 유명한 영화들이 나오며,

페티시즘 이론적, 정신분석학적,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영화에 대한 전복적인 재독해를 시도한다고 한다.

이 끝내주는 책을, 강연 참여자에게 무려 20%나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길래 잽싸게 질러버렸다.






강연이 끝나고 근처 마로니에 공원을 산책하려 하는데, 마침 공원에서는 (공교롭게도) 페미니즘 문화예술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각자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타로를 봐주거나,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스스로 예술작품이 된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 사진의 '관람 신체'는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의 보라색 리본들은, 사회에서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들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넷상에서 돌았던 유명한 문구들은 반짝이펜으로 칠했다고 한다.



다음 사진은,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페미니스트 예술가의 작품들이다.

풍선에는 그녀가 여성으로서 느끼고 있는 경험과 느낌이 적혀있다.

여성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서, 있는둥 마는둥 한 공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풍선에 메달았다고 한다.

원래는 더 높게 메달아서 사람들이 풍선을 당겨야만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끔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로 여성이 느끼는 부조리는 쉽게 사회의 중요한 의제가 되질 못한다.

사소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한다.

풍선에 메달린 문구를 다 읽었을 때, 바람으로 인해 순식간에 내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사진은, 누워있는 사람 앞을 유리병들로 가려놓은 사진이다.

얼핏 보면, 그 형체가 모호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작가는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모호함을 질문하고자 이러한 작품을 내놓았다고 한다.



본의아니게 페미페미한 하루를 보냈다.

영화와 예술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로도 유명한 봉준호의 2017년도 신작, 옥자가 개봉했다.

넷플릭스 개봉으로 인해 대형 멀티플렉스 3사로부터 상영을 거절당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양성 영화관을 찾아가게 되는 새로운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엔 할리우드 물 좀 먹었나?’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봉준호는 봉준호네.’라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옥자는 어느 슈퍼돼지 옥자와 산골소녀 미자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본주의, 식품 산업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육식주의자들이 식품으로 여기는 어느 슈퍼돼지의 주인공으로 한다.

슈퍼돼지인 옥자가 펼치는 모험은 굉장히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또한 모험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자본가, 화이트 칼라, 노동자, 운동가들의 행동들과 그들이 마주하는 상황들은

블랙코미디와 동화를 버무린 듯한 인상을 주며 관객들을 유쾌하게 만든다.

봉준호의 날카로운 사회적 시선과 봉준호만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봉준호의 염세적 시선도 보인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염세적이다 못해 번아웃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준다.

물론 이 영화가 염세적인 영화냐고 묻는다면 이견이 갈릴 것 같긴 하다.


봉준호 작품들 중에서는 굉장히 유쾌하고 또 굉장히 씁쓸하다.

육식주의, 식품 산업주의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봉준호만의 색깔을 입혀 보여준다.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독특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꼭 보시라.

다만 흑백구도나 권선징악을 기대하고 있다면 각오하고 보시라.




평론 보러가기 http://baejjangmovie.tistory.com/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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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평가받는 바이오쇼크1을 내놓았던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바이오쇼크1이 해저도시를 그렸다면,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공중도시를 그린다.

배경은 1900년대 즈음으로, 미국 우월주의, 신권정치와 자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겉보기에) 유토피아적 세계인 컬럼비아이다.


바이오쇼크1의 해저도시 모습 


인피니트의 공중도시는 시리즈 1의 음침해 보이는 도시에 비해 굉장히 낭만적이고 화사하다.


도시는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게임을 하면서 정말 많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또 단순히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고, 공중도시의 사회상을 미학적으로 잘 드러낸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종교적인 메시지들, 엄숙하고 웅장한 예술상과, 지도자를 효과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들.

그만큼 매 공간들이 섬세하고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다.

플레이하게 되면 아름다운 것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보여주는 장관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주로 대립하는 키워드는 인종과 자본주의이다.

유색인종은 죄인으로 취급받고 착취당하며, 심각한 불평등에 의해 노동자들은 삶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분노한 유색인종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권력자에 맞선다.



그러나 이 게임의 주인공인 부커 드윗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저 빚을 탕감하려면 여자를 데려와라.’라는 의뢰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누빌 뿐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되는 이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는 꽤나 충격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자면, 게임은 단순히 미국 우월주의, 자본주의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세계에 양자역학을 뒤섞는다.

그럼으로써 조금은 복잡하지만 지적 쾌감을 선사해주면서도, 하나의 독창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체험 시켜준다.

 


바이오쇼크 1의 형태를 따라가지만, 전투나 이동의 자유도는 줄어들고 직선적인 플레이가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또 활기있는 캐릭터를 지닌 엘리자베스와의 협력으로 적어도 외롭지 않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해석 (스포일러가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는 부커 드윗의 내면 세계이다. 부커는 콤스톡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해설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공중 도시는 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 이후로 세례를 받은 부커 드윗(콤스톡)이 세운 도시이다. (운디드 니란 백인 개척자들에 의해 벌어진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건을 말한다.)

결국 그는 미국 식민지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세례를 통해, 부커 드윗은 가해자로서의 드윗(콤스톡)과 피해자로서의 드윗(탐정사무소 드윗)으로 분열된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드윗이라고 묘사했다고 그의 가해자성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려 하는 건, 그를 오염시킨 사회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속죄의 의지가 있는 드윗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지나치게 평행우주를 넘나든 콤스톡은 생식능력을 잃고 부커 드윗의 딸을 훔쳐 간다.

경제난에 굴복한 부커 드윗은 뒤늦게 후회하고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여기에서 콤스톡에게 살해당한 루커스 남매는 콤스톡을 없애기 위해 부커 드윗을 콤스톡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루커스 남매는 공중도시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다. 그들의 과학적 동조가 자신의 신격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콤스톡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이후 양자단위로 쪼개져 평행우주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혼란스러운 드윗은 기존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공중도시의 존재와 거기에 가야 하는 자신의 이유를 수립한다.

결국 그가 찾는 건 그의 딸이였고, 그가 없애고자 하는 건 가해자로서의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진정한 속죄가 아니다. 다시 기억을 되찾은 그가 깨달은 건 콤스톡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콤스톡의 가능성, 즉 시대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하는 건 피해자로 대표되는 엘리자베스에 의한 죽음이다.


콤스톡이 그의 딸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딸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가부장적 존재이다.

오히려 딸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개조하려 하고 훈육하려 한다.

게임에서 보여주는 콤스톡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애나는 콤스톡의 손에 들어갈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탈당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굉장히 염세적으로 게임은 끝나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탐정사무소에서 드윗이 애나를 찾는 숨겨진 장면이 나온다.

(게이머의 상상에 엔딩을 맡기겠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보인다.)

필자의 입장에서 부커 드윗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속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그의 철학, 삶의 양식을 벗어 던지는 행동,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익사할 때, 무수한 평행세계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진다.

콤스톡의 가능성이 지워지자 콤스톡 세계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엘리자베스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딸 애나를 키우고 있는 가난한 탐정 부커 드윗으로 돌아가게 된다.

위대한 개척자 가부장적인 백인 미국인을 지워내고,

부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드윗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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